국악 거장이 뿌린 씨앗, 거목으로 열매 맺다[문화대상 이 작품]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4월 21일, 오전 07:58

[정소희 용인대 국악과 교수·대금연주가] 서해와 맞닿은 너른 들판의 도시 평택은 오래전부터 많은 전통예인을 배출한 고장이었다. 그 토양이 빚어낸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바로 민속음악의 아버지 지영희(1909~1980)다. 해금과 피리의 명인이자 국악 교육자, 작곡가, 국악관현악단 창시자, 지휘자, 무용음악가로서 그는 국악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평생을 바친 천재 음악가였다.

지난 15일 평택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열린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 ‘지영희의 음악세계’의 한 장면. (사진=평택시문화재단)
창단 2주년을 맞은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이 지난 15일 ‘지영희의 음악세계’라는 주제로 그의 예술혼을 조명하는 무대를 평택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마련했다. 지영희가 평택에 뿌린 음악의 씨앗이 깊은 뿌리를 내려 풍성한 결실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지영희 작곡, 박범훈 편곡의 관현악 ‘만춘곡’으로 공연의 막이 올랐다. ‘따스한 봄기운이 가득한 노래’라는 뜻답게 객석에 싱그러운 봄 분위기를 전하는 곡이다. 이어진 ‘지영희류 해금산조 협주곡’에서는 해금 명인 김영재와 제자 이강산이 한 무대에서 호흡을 맞췄다.

김영재의 연주는 오롯이 소리로 집중해 기교를 넘어선 대가의 공력으로 경기제 산조 특유의 유려함과 경쾌함을 동시에 품었다. 제자 이강산은 스승의 선율 위에 자신의 색을 더하면서도 그 결을 해치지 않으려는 절제된 태도를 보였다. 스승과 제자가 같은 산조를 나란히 연주하는 장면 자체로 깊은 울림을 남겼다.

지영희의 부인이자 음악적 도반(道伴, 함께 도를 닦는 벗)인 성금연이 작곡한 15현 가야금 협주곡 ‘흥’은 이들의 딸 지순자가 철가야금으로 연주했다. 금속 줄을 사용한 철가야금의 음색은 선명하면서도 부드럽고 깊어 여유와 흥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지난 15일 평택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열린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 ‘지영희의 음악세계’의 한 장면. (사진=평택시문화재단)
‘박범훈류 피리산조 협주곡’에서는 스승 박범훈과 제자 천성대가 나란히 피리를 쥐었다. 두 사람이 음악과 혼연일체가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무대는 충분했다. 지영희의 산조가 박범훈을 거쳐 천성대에게로 흐르는 이 도도한 계보가 무대 위에서 살아 있는 현실로 펼쳐졌다.

공연의 대미는 지영희제 태평소 협주곡 ‘호적풍류’가 장식했다. 지영희의 제자 최경만이 태평소를 들자 공연장의 공기가 단숨에 바뀌었다. 그의 소리는 눅진한 농도로 섬세한 시김새(음을 흔들거나 꾸미는 표현 기법)를 표현했다. 여기에 평택농악보존회의 농악이 무대에 더해지며 열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북과 꽹과리의 신명과 태평소 선율이 어우러지며 공연은 뜨겁게 마무리됐다.

이날 공연은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고 2년여 동안 상임지휘자를 맡아온 김재영 지휘자의 고별 무대이기도 했다. 그는 이 마지막 무대에서 지휘봉 대신 태평소를 들었다. 오랜 세월 지휘자로 살아온 그가 연주자의 자리에 서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지영희가 남긴 것은 단지 악보와 선율이 아니다. 스승에서 제자로, 어머니에서 딸로, 지휘자에서 연주자로 이어지는 관계의 서사가 음악과 함께 깊이 각인됐다. 사람을 통해 이어지는 소리의 길, 그 흐름은 지금도 살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지난 15일 평택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열린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 ‘지영희의 음악세계’의 한 장면. (사진=평택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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