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대원군 척화비 (출처: 문화재청 (공공누리 제1유형), CC BY-SA 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via Wikimedia Commons)
1871년 4월 25일, 조선 전역에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겠다는 서슬 퍼런 경고문이 세워졌다. 이른바 척화비(斥和碑)의 건립이다.
당시 집권자인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주요 도성 및 요충지에 척화비를 건립하라는 명을 내렸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며 거세진 외세의 통상 압력을 물리친 후 민심을 결집하기 위해서였다.
비석 중앙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을 구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열두 글자가 새겨졌다. 이는 단순한 구호를 넘어, 당시 조선 정부가 지향하던 강력한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과 쇄국 정책의 결정체였다. 비석 측면에는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는 문구를 더했다.
흥선대원군의 비석 건립은 대내외적인 위기감 때문이었다. 프랑스와 미국의 함대를 차례로 격퇴하며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내부적으로는 천주교를 비롯한 외래 사상의 유입을 차단하고 외부적으로는 서구 식민지 체제에 편입되지 않겠다는 완고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척화비는 전국 각지의 장터와 길목에 배치되어 백성들에게 서구 세력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심을 고취하는 상징물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 비석에 담긴 고립주의는 '양날의 검'이었다. 당장의 침략은 저지했지만,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근대화의 흐름으로부터 조선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훗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압송되면서 대부분의 척화비는 철거되거나 매몰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소수의 척화비는 구한말 격동의 역사 속에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절박한 민족주의적 저항과, 동시에 근대화의 기회를 놓쳤던 시대적 한계를 동시에 증언하는 유물로 평가받는다. 이 돌덩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자주와 개방 사이의 해법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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