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와 잘 지낼 수 없어도 적당한 교류 필요해"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4월 29일, 오전 05:10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멀리서 보면 평온한 일상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균열과 상처가 쌓여 있다.

김혜진(43) 작가의 신작 소설집 ‘달걀의 온기’(창비)는 이 같은 일상의 이면을 포착한다. 타인과 상처를 주고받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는 현대인의 일상을 비추면서도, 그 안에 스며 있는 작은 친절과 선의를 끄집어낸다. 문을 잡아주는 찰나의 배려 같은 ‘사소한 접점’들이 어떻게 사람을 덜 외롭게 만드는지를 세밀하게 그려냈다.

김 작가는 28일 이데일리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주변을 알아가는 건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을 줄여나가는 과정”이라며 “타인과의 작은 접점을 만들어내는 태도는 개인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삶의 기술”이라고 밝혔다.

김혜진 작가(사진=ⓒ이해수 사진작가 제공).
◇선의도 오해받는 세상

김 작가는 한국 문학의 현재를 또렷하게 보여주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2012년 단편소설 ‘치킨 런’으로 등단한 후 중앙장편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대산문학상, 젊은작가상, 김유정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2017년 발표한 ‘딸에 대하여’는 영화로 제작된 데 이어 16개 언어로 번역·출간되며 해외 독자들과 만났다. 이 작품으로 프랑스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 후보에 오르며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번 소설집에는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인 ‘푸른색 루비콘’을 포함해 총 7편의 단편이 실렸다. 일상 속에 축적된 외로움과 상처, 오해의 순간들을 풀어내며 관계의 이면을 차분하게 들여다본다. 김 작가는 “모두가 무심하게 보내는 것 같은 일상에도 작은 서사들이 있다”며 “아주 특별하진 않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일상의 궤적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관종’(과도한 관심을 추구하는 사람)은 타인을 향한 선의의 관심조차 병으로 취급되는 세태를 꼬집는다. 평소 이웃의 무질서한 행위에 서슴없이 목소리를 내온 ‘정해’와 ‘영기’는 어느 추운 겨울날 길에서 떨고 있는 남매를 발견하고 주저 없이 경찰에 신고한다. 그러나 이들의 관심은 결국 아파트 현관문에 ‘관종’이라는 쪽지가 붙는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김 작가는 “부모 세대에는 이웃과의 소통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면, 요즘은 누군가의 관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조차 낯설어진 것 같다”면서 “그 결과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이런 경향이 개인을 더욱 소외시키고 외롭게 만든다”고 짚었다.

◇“타인과 가벼운 교류는 필요”

타인을 향한 시선은 작품마다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푸른색 루비콘’은 관계에 소극적이던 70대 은퇴자 손경수가 박훈식과의 만남을 통해 서서히 마음을 여는 과정을 그린다. 젊은 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지프차 ‘루비콘’을 그의 차로 설정해 낯선 세계와 연결되는 계기를 만들어낸다.

‘달걀의 온기’는 어린 민지가 파는 ‘청란’(푸른빛을 띠는 달걀)을 마을 어른들이 사주는 방식으로 공동 돌봄이 이뤄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건넨 ‘청란’을 받아든 순간, 투자 사기로 빚을 떠안은 뒤 마음이 식어버린 ‘선희’는 그 안에 담긴 온기를 비로소 느낀다.

김 작가는 “우리는 낯선 이들과도 작은 호의와 친절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며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는 사소한 순간이 누군가의 하루를 전혀 다른 빛깔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관계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그는 ‘적당한 거리의 교류’를 제안한다. 김 작가는 “타인과의 접점을 통해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고, 무엇을 경계하고 어디까지 안심해도 되는지를 배워간다”며 “모두와 깊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가벼운 교류만큼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은 주변에 대한 현미경 같은 관찰에서 출발한다. 청년 구직자부터 중년 노동자, 노숙인 등 사회에서 조명받지 못한 이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결핍과 부조리를 드러내왔다. 타인의 삶을 따라가는 일은 곧 우리 자신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김 작가는 “소설은 남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나와 맞닿아 있는 이야기”라면서 “앞으로도 삶의 부근에서 마주칠 수 있는 작은 풍경들을 따라가 보고 싶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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