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태어나는 문제'…"우생학은 광기가 아닌 합리의 언어였다"
1939년 봄, 독일 라이프치히 외곽의 농장에서 일하는 한 부부가 장애아들의 안락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장애가 있는 제 아이가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죽여주세요"
히틀러는 이를 승인했고, 이 사건은 독일이 정신적 신체적 장애가 있는 이들에게 '자비로운 죽음'을 안기는 대규모 계획 T4 작전을 착수할 명분이 됐다.
독일농부의 편지처럼 에릭 L. 피터슨의 '태어나는 문제'는 인간의 가치를 유전자로 가를 수 있다는 믿음이 어떻게 우생학이라는 이름의 제도와 관행으로 굳어졌는지 추적한 역사서다.
저자는 우생학을 지나간 광기가 아니라 더 나은 삶과 건강한 아이를 바라는 자연스러운 욕망이 어떻게 배제와 통제의 논리로 변하는지 보여주는 현재진행형의 사고방식으로 읽는다.
책은 2020년 리처드 도킨스의 트윗과 2024년 도널드 트럼프의 발언에서 출발한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나온 말이지만, 인간의 가치를 '유전자'로 평가하고 사회를 그 기준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전제를 함께 품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익숙한 생각이 어디서 왔고 어떤 제도와 정책으로 굳어졌는지 묻는다.
이 책은 우생학을 프랜시스 골턴 이후의 근대 과학 담론으로만 좁히지 않는다. 약 2500년 전 그리스 시인 테오그니스의 혈통 개탄, 플라톤의 선별적 번식 논의, 창세기에 나타난 '종류'와 운명 개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인간이 타고난 본질 때문에 특정 결과를 맞도록 정해져 있다는 오래된 신념을 우생학의 밑바탕으로 짚는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부는 이 사고가 과학의 이름으로 어떻게 다듬어졌는지 보여준다. 범죄자의 뇌를 해부하며 범죄성과 유전적 결함을 연결한 논의, 오네이다 공동체의 '통제된 인간 번식' 실험, 미국 각지에서 제도화된 불임화 정책과 우생학기록사무소의 활동이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우생학은 도덕과 정책, 의학과 통계가 손잡은 사회운동으로 몸집을 키운다.
[신간] '태어나는 문제'…"우생학은 광기가 아닌 합리의 언어였다"
책의 한 축은 미국과 유럽, 특히 나치 독일 사이의 연결을 파고드는 데 있다. 저자는 나치의 우생학을 독일 내부의 특수한 광기로만 보면 오히려 더 중요한 흐름을 놓치게 된다고 본다. 영국과 미국에서 축적된 우생학 담론과 제도, 네트워크가 독일 사회와 가정으로 스며들며 더 파괴적인 형태를 준비했다는 것이다.
후반부는 1945년 이후에도 우생학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푸에르토리코의 인구 통제, '인구 폭탄' 담론, 빈곤과 범죄를 겨냥한 불임화 정책, 복지와 이민 문제를 둘러싼 배제의 논리가 차례로 등장한다. 강압적 국가 정책의 얼굴이 약해진 자리에, 사회적 비용 절감과 위험 관리, 합리적 선택이라는 더 부드러운 언어가 들어섰다는 진단이다.
저자는 이를 '벨벳 우생학'이라 부른다. 생명공학과 유전체 기술의 발달은 선택을 더 정교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어떤 삶이 태어나도 되는가를 가르는 기준도 더 정교하게 만든다. 장애와 질병의 문제에서 출발한 판단이 잠재력과 사회적 조건의 문제로 넓어질 때, 우생학은 강제가 아니라 선택의 언어로 되돌아온다.
결국 '태어나는 문제'는 우생학이 특정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사회의 기준 문제라고 말한다.
△ 태어나는 문제/ 에릭 L. 피터슨 지음/ 김하현 옮김/ 낮은산/ 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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