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학고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종구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 뉴스1 김정한 기자
1980년대 정부미 쌀부대에 투박한 농민의 얼굴을 그려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던 민중미술의 거장이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리얼리즘 회화를 대표하는 이종구 작가가 정년퇴임과 코로나19라는 커다란 삶의 변화를 겪은 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학고재 본관과 온라인 전시관 학고재 오룸에서 개인전 '사유 : 思惟'를 선보인다.
20일 학고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종구는 "과거 민중미술가로 활동하며 삶의 현장에서 팍팍한 현실을 고발하고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활동에 많이 참여했다"며 "하지만 코로나19를 거치고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지면서 싸움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종구 '사유 : 思惟'전 전시 전경. © 뉴스1 김정한 기자
과거의 그가 농촌의 피폐한 현실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직설적으로 고발하는 전사였다면, 이번 전시는 한 걸음 물러서서 깊게 깊이 생각하는 구도자의 자세를 취한다. 작품들의 중심축은 뜻밖에도 고요하게 명상에 잠긴 반가사유상이다.
이종구는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이러한 성찰을 담아냈다"며 "반가사유상의 미소에 담긴 평화의 메시지가 관람객들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
전시장의 작품들은 화폭이 둘로 나뉘어 한쪽에는 평화로운 불상이, 다른 한쪽에는 촛불이나 물결, 혹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사람들의 무리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이러한 배치는 최근 전 세계를 불행으로 몰아넣은 전쟁과 기후 재난, 그리고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폭력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종구, 불이(不二)_무무명,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x130cm (학고재 제공)
작가는 비극적인 현장을 자극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불상의 객관적인 눈을 빌려 담담하게 관조한다. 불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 제목들도 단순히 종교적 가르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과 치유가 어떻게 맞물리는지 보여주는 장치다.
오랜 세월 교단에서 제자들을 기르며 치열하게 현장을 지켰던 작가는 은퇴 이후 비로소 내면을 들여다볼 여유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투쟁의 도구였던 그의 붓끝은 이제 시대의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달래는 힘을 갖추게 됐다.
이번 전시는 거친 목소리로 소리치지 않아도 회화가 얼마나 묵직하게 사회와 연대할 수 있는지 증명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세상의 온갖 소음에 지친 현대인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되짚어볼 수 있는 귀중한 사색의 시간을 선사한다.
acenes@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