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의 바다, 바다 품은 절…이 봄날이 극락이오 [여행]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5월 22일, 오전 06:01

[양양·속초(강원도) 글·사진=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봄날의 절집을 찾는 일은 마음의 안부를 묻는 일과 닮았다. 고단한 순례를 자처할 필요는 없다. 연등 아래를 천천히 걷고, 바람 한 줄기를 맞고, 그 길 끝에 산길 하나를 더하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깊어진다. 양양 낙산사와 속초 토왕성폭포는 그런 여정에 어울리는 두 장소다. 낙산사가 동해를 향해 가슴을 열어젖힌 수평의 공간이라면, 토왕성폭포는 설악의 암벽을 향해 몸을 낮추며 오르는 수직의 길이다. 바다 앞에서는 마음이 넓어지고, 절벽 앞에서는 자세가 낮아진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강원도의 봄은 그렇게 바다에서 시작해 산의 벽 위에서 완성된다.

기암괴석의 절벽 끝에 위태로우면서도 의연하게 서 있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의 홍련암(紅蓮庵). 에메랄드빛 푸른 동해바다와 깎아지른 바위 벼랑을 따라 걸어 들어가는 길은 그 자체로 지극한 신앙의 여정이다.
초파일을 앞둔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 경내는 그야말로 화사한 연등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고색창연한 처마 밑마다, 그리고 너른 마당을 가로지른 줄마다 빽빽하게 걸린 연등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당 위로는 오색의 그림자가 파도처럼 출렁인다.
◇푸른 동해를 품은 바다의 절

양양 ‘낙산사’는 길보다 바람이 먼저 마중 나온다. 일주문에 닿기 전부터 갯내음과 솔향이 섞인 해풍이 콧잔등을 스친다. 이곳이 산중 사찰이 아니라 바다와 맞닿은 절이라는 사실은 금세 감각으로 전해진다. 해송들은 모진 바람을 견디느라 한쪽으로 조금씩 기울어 있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는다. 거친 자연에 맞서기보다 그 방향을 받아들이며 제 자리를 지켜낸다. 낙산사의 첫인상은 그 해송의 자세에서 시작된다.

낙산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관음 도량이다. 동해 벼랑과 사찰이 맞닿은 지형은 이 절의 신앙과 풍경을 함께 만들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경내는 연등의 바다다. 처마 아래 빼곡히 매달린 연등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당 위로 오색 그림자가 번진다.

낙산사의 중심 전각인 원통보전(圓通寶殿)과 그 앞에 단정하게 솟은 보물 제499호 낙산사 칠층석탑. 황토와 기와로 쌓아 올린 나지막한 담장 안쪽으로 정갈하게 정돈된 마당이 아늑한 사색의 공간을 제공한다.
원통보전 앞에는 ‘칠층석탑’(보물 제499호)이 단정하게 서 있다. 조선 세조 때 중수되며 현재의 7층 석탑으로 정비된 것으로 알려진 높이 6.2m의 화강암 석탑이다. 바닷바람에 깎이고 모서리가 닳은 탑은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하다. 기와를 켜켜이 박아 넣은 황톳빛 담장은 낮은 곡선으로 법당을 감싼다. 그 담장 곁에서 풍경 소리를 듣다 보면 마음의 날 선 모서리도 조금씩 무뎌진다.

강원도 양양 낙산사의 해수관음상 아래 묵직하게 엎드려 삼배를 올리는 불자의 뒷모습. 푸른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관음상의 자태가 보는 이의 마음까지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언덕 위로 오르면 ‘해수관음상’이 동해를 향해 서 있다. 높이 16m의 화강암 석불 앞에서 신도들은 절을 올리고, 여행자들은 말없이 수평선을 바라본다. 동해는 멀리서 하늘과 경계를 지운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그 푸른 선 앞에서는 붙들고 있던 생각들도 조금씩 느슨해진다.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말보다 바다의 침묵이 더 오래 남는다.

강원도 양양 낙산사의 홍련암 법당 바닥에 설치된 조그만 관음굴 관풍창(觀風窓)을 통해 내려다본 절벽 틈새. 거친 화강암 벼랑 사이로 쉬지 않고 들이치며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역동적인 울림이 유리를 뚫고 전해진다.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붉은 연꽃 속에 나타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고 전해지며, 벼랑 틈의 파도 소리는 예로부터 관음의 독경 소리로 읽혔다.
낙산사의 절정은 ‘홍련암’이다.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해안 석굴 앞에서 기도하다 붉은 연꽃 속 관음보살을 보았다는 설화를 품은 암자다. 법당 안 마룻바닥에 엎드려 관풍창을 들여다보면 절벽 아래 파도가 흰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소리는 좁은 창을 타고 가슴까지 올라온다. 홍련암에서는 풍경을 바라본다기보다 그 안으로 스며드는 감각에 가깝다. 벼랑 끝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절집의 고요가 파도 소리와 함께 오래 남는다.

토왕성폭포 등산코스는 설악산 소공원(탐방지원센터)에서 육담폭포·비룡폭포를 거쳐 토왕성폭포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코스가 대표적이다. 총 거리·시간은 대략 5 ~ 6km, 왕복 약 2시간 ~ 2시간 30분으로, 비룡폭포 이후 900계단 구간이 가장 힘들다. 사진은 등산코스 중 육담폭포와 출렁다리.
◇마른 폭포가 드러낸 설악의 뼈대

‘토왕성폭포’로 가는 길은 속초 설악산 소공원에서 시작된다. 반달곰 조각상 왼쪽 다리를 건너면 숲길이 열린다. 초입은 순하다. 흙길은 부드럽고 계곡물 소리는 낮다. 고개를 들면 설악의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육담폭포’에 이르는 길은 봄날 산책이라 불러도 좋다. 화강암 벽과 계류가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처럼 펼쳐진다.

토왕성폭포 등산코스는 설악산 소공원(탐방지원센터)에서 육담폭포·비룡폭포를 거쳐 토왕성폭포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코스가 대표적이다. 총 거리·시간은 대략 5 ~ 6km, 왕복 약 2시간 ~ 2시간 30분으로, 비룡폭포 이후 900계단 구간이 가장 힘들다. 사진은 등산코스 중 비룡폭포
육담폭포 앞 출렁다리를 지나면 길의 표정이 달라진다. ‘비룡폭포’에서 토왕성폭포 전망대까지는 400m 남짓한 오르막이다. 짧다고 얕볼 길은 아니다. 비룡폭포를 돌아서는 순간부터 흙길은 사라지고 절벽을 따라 데크 계단이 가파르게 솟는다. 900개가 넘는 계단은 숫자로 들을 때보다 몸으로 밟을 때 더 길다. 허벅지가 묵직해지고 숨이 짧아진다. 물소리를 따라 걷던 길은 어느새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 길로 바뀐다. 설악은 제 속살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계단 위에서는 누구나 말수가 줄어든다. 한 칸씩 발을 올릴 때마다 몸은 낮아지고 시선은 높아진다. 중간 쉼터에 기대서면 땀을 식히는 바람이 계곡 아래에서 올라온다. 뒤돌아보면 지나온 숲길이 낮게 깔리고, 앞을 보면 암벽은 여전히 높다. 아이 손을 잡은 가족도, 등산 스틱을 짚은 중년의 등산객도, 외국인 여행자도 같은 속도로 숨을 고른다. 이 길의 매력은 전망대에만 있지 않다. 오르는 동안 몸이 조금씩 비워지는 데 있다.

토왕성폭포 등산코스는 설악산 소공원(탐방지원센터)에서 육담폭포·비룡폭포를 거쳐 토왕성폭포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코스가 대표적이다. 총 거리·시간은 대략 5 ~ 6km, 왕복 약 2시간 ~ 2시간 30분으로, 비룡폭포 이후 900계단 구간이 가장 힘들다. 사진은 토왕성폭포에서 바라본 토왕성폭포의 모습. 현재는 물줄기가 많이 약해져서 희미하게 폭포 물줄기가 보인다.
전망대에 서면 토왕성폭포가 석벽 사이에 걸려 있다. 설악산을 대표하는 폭포인 토왕성폭포는 전체 높이 320m에 이르는 3단 폭포다. 비가 충분히 내린 뒤에는 하늘에서 흰 비단이 풀리듯 바위벽을 타고 흐른다. 그러나 봄 가뭄이 길어진 날에는 세찬 물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물이 지나간 자리가 검푸른 물이끼의 흔적으로 남아 바위 벽 위에 긴 선을 그린다. 마른 폭포는 빈 폭포가 아니다. 비가 내리고 계곡이 차오를 때 다시 쏟아질 물길의 자리를 묵묵히 보여주는 폭포다.

그날 전망대의 풍경은 요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잠시 탄성을 흘리다 이내 조용해졌다. 물이 없어서 허전한 것이 아니라 물이 없어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겹겹이 솟은 바위의 결, 폭포가 지나간 검은 흔적, 골짜기를 타고 오르는 바람의 방향이 선명했다. 장마철 폭포가 물의 힘을 보여준다면, 가문 계절의 폭포는 바위의 시간을 보여준다. 살을 덜어낸 겨울나무가 때로 더 아름답듯, 물기 없는 화강암 벽은 장식 없는 장엄함을 품고 있다.

좋은 여행지는 빼어난 경치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 풍경 앞에 선 사람을 조금 달라지게 한다. 낙산사의 수평선은 마음의 폭을 넓히고, 토왕성폭포의 수직 벽은 몸의 자세를 낮춘다. 바다는 욕심을 흩어놓고, 산은 오만을 거두게 한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강원도의 봄길은 그래서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었다. 바다와 절벽 사이에서 스스로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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