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SEN=강희수 기자] 기자에게 주어진 시승 기회는 춘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54.1km 구간. 마음이 바쁘다.
예전 같으면 오감을 동원해 차와의 대화에 집중하면 됐다. 그런데 이제는 차와 자연어 대화도 해야 한다. 7세대 그랜저의 페이스리프트 모델, ‘더 뉴 그랜저(The new Grandeur)’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렇게 해봐야 한다고 들었다.
마음이 바쁘니 찬찬히 친해질 시간이 없다. 틈나는 대로 밟고 굴렸다.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마음에 드는 요소도 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반응도 있다.
그보다, 엉뚱한 곳에서 놀라운 결과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차의 트림 컴퓨터가 측정한 평균 연비다. 54.1km를 41분간 운전했는데, 연비가 12.6km/ℓ다. 혼자 탄 것도 아니고, 딱히 연비 운전을 한 것도 아니었다.
좀 놀랍다. 더 뉴 그랜저의 전장은 5050mm다. 억지로 분류하자면 준대형 세단에 해당된다. 이런 체구의 연비가 12.6km/ℓ라니. 이 정도면 비싼 하이브리드가 굳이 필요할까?
높은 연비에는 함정이 있다. 파워트레인의 유형에 따라 ‘더 뉴 그랜저’는 크게 다른 성격의 차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더 뉴 그랜저는 가솔린 2.5, 가솔린 3.5, LPG 3.5, 가솔린 1.6 터보 하이브리드로 라인업이 형성된다. 이 중, 최근의 미디어 시승 행사에 동원된 차는 가솔린 2.5뿐이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 차 한 종을 타보고 더 뉴 그랜저를 품평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가솔린 2.5’는 무난한 주행에 특화시킨 차로 보인다. 주행감도 안정적이고, 연비도 괜찮은 그런 차 말이다. 그런데, 가솔린 3.5와 가솔린 1.6 터보 하이브리드를 탔을 때도 같은 ‘더 뉴 그랜저’로 인식될 수 있을까? 엔진 유형 별로 다 타봐야 비로소 더 뉴 그랜저를 총평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1.6 터보 하이브리드는 현재 정부 인증 절차를 밟고 있는데, 예정대로라면 7월초에 양산에 들어가 중순 이후 구매자들에게 인도될 수 있다.
더 뉴 그랜저 가솔린 2.5는 스마트스트림 2.5리터 4기통 자연흡기 엔진(8단 자동변속기)을 품고 있다. 최고출력 198PS, 최대토크 25.3kgf·m의 스펙이다. 공인 복합 연비는 11~11.6km/ℓ(도심 9.4~9.9km/ℓ, 고속 14.1~14.9km/ℓ). 시승 코스에 고속도로 구간이 길기는 했지만 차를 거칠게 다뤘기 때문에 특별히 높은 연비가 나올 조건은 아니었다.
시승에서 보여준 12.6km/ℓ의 연비는 꽤 놀라운 수준이다. 대놓고 연비 운전을 하면 15.0km/ℓ대도 가볍게 상회할 것으로 보인다. 연비가 높으면 잃는 것도 있다. 상대적으로 낮은 토크로 세팅이 돼 있기 때문에 가속이 부드럽기는 하지만 거친 맛은 떨어진다. 더 뉴 그랜저 가솔린 2.5가 딱 그런 맛이다. 핫하지는 않지만 점잖게 잘 달린다.
파워트레인 변수를 제거한다면 ‘더 뉴 그랜저’의 주행질감을 높여준 요소로 하체보강을 꼽을 수 있다. 이전 세대 그랜저를 소유한 미디어 시승회 참가 기자가 인정한 변화 포인트다. 고속도로 주행이나 불규칙한 노면에서의 차체 움직임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는 귀띔이다.
현대차도 특히 더 신경 쓴 지점이 하체보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대시보드 안쪽에서 좌우방향 뒤틀림을 잡아주는 카울 크로스바의 두께를 증대했고, 전륜 스트럿링 강성증대를 위해 차체를 보강했다. 서스펜션에는 유압제어 리바운드 스토퍼를 배치해 노면에서 전달되는 충격을 완화했다. 기존 20인치 휠 사양에서만 적용이 가능했던 프리뷰 전자제어 서스펜션(ECS)을 19인치 휠 사양까지 확대했다.

이제 서두에서 언급했던 자연어 대화자, ‘글레오 AI(Gleo AI)’ 이야기를 해야겠다.
현대자동차의 기술 혁신 타임 테이블로 보면 ‘더 뉴 그랜저’는 역사적인 차다. 현대차가 추구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중심의 자동차, SDV의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차세대 인포테인먼트 플랫폼 ‘플레오스 커넥트(Pleos Connect)’를 더 뉴 그랜저에 최초로 탑재했는데, 이 플랫폼에서는 ‘글레오 AI’라는 생성형 AI 에이전트가 구동된다.
‘글레오’는 현대자동차의 글로벌 소프트웨어 센터 포티투닷이 개발한 생성형 AI 에이전트의 이름이다. 애플의 ‘시리’처럼 현대차의 대화형 AI 비서는 ‘글레오’라는 이름을 얻었다. ‘더 뉴 그랜저’에서 AI 비서를 깨우고 싶으면 ‘글레오’라고 부르면 된다.
‘글레오’라는 이름이 혀끝에 착 달라붙지는 않지만 제법 말귀는 잘 알아듣는다.
“좀 더운 거 같은데?”라고 하면 “에어컨을 켜 드릴까요?”라고 묻고 온도 조절을 한다. “오늘 잠실에서 열리는 프로야구 선발 투수의 장단점을 찾아줘”라고 물으면 잠시 검색을 한 뒤 꽤 정확한 정보를 알려준다.
민감한 질문에는 괜한 논란은 피해가는 조심성을 먼저 배웠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서울 시장은 누가 될 것 같아?”라든지, “미국이 좋아 중국이 좋아?”라고 물으면 기계적으로 가치 중립적인 대답을 한다. ‘글레오 AI’ 개발에 참여한 엔지니어들도 “LLM(대규모 언어 모델)을 설계할 때 민감한 내용이나 정치적인 내용의 질문은 적절히 대답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가드레일을 설정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대화라는 게 그렇다.
친구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상대의 말이 끝날 때까지 아무 반응이 없다가 상대의 말이 끝나면 한 템포 뜸을 들인 뒤 답을 한다. 맞장구가 없다. 솔직히 이런 친구들과는 대화를 하기가 겁난다. 답답한 건 둘째 치고 내가 하는 말의 꼬투리를 찾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더 뉴 그랜저에 자연어 대화가 가능하도록 퀄컴 스냅드래곤 콕핏 4세대 칩이 내장돼 있다고는 하나, 질문을 하면 맞는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이 ‘시간차’로 나타난다. 한 번에 맞는 답을 찾아 일회성 대화로 끝내려는 의지가 너무 강하다. 대화는 오고 가는 맛인데, 그런 방식의 대화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 보인다.
글레오 AI는 이제 걸음마 단계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똑똑해지는 학습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면접관과 수험생의 질의응답이 아닌, 친구간의 대화 방식을 머지않아 깨우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더 뉴 그랜저’가 SDV 1호차의 사명을 띠고 있다는 건 실내 디자인에서 시각적으로 확인된다.
센터페시아 중앙에 자리잡은 17인치 대형 디스플레이가 “난 이제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어”라는 말을 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좀 조심스럽다. 대화는 가능하지만, 대화를 통해 수행할 수 있는 실행 파일은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다. 창문을 열고 닫거나, 온도나 볼륨 조절을 하고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찾아 내는 정도다. 자율주행이 허용되는 시대가 돼야 제 구실을 해낼텐데,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운전대 뒤쪽에 전통적으로 자리잡고 있던 클러스터가 사라진 것도 진보적이다. 꼭 필요한 정보는 9.9인치 슬림 디스플레이에 담겨 대시보드 위에 덩그러니 올라 앉았다. 클러스터에 표출되던 정보는 헤드업디스플레이가 담당하게 됐으니, HUD는 필수 옵션으로 등급이 올라갔다.

현대차 최초로 더 뉴 그랜저에 탑재된 ‘스마트 비전 루프’도 신기하기는 하다.
루프를 여는 버튼은 종전과 같은 형태로 달려 있는데, 루프가 열리는지 닫히는지는 소리로 알 수 없다. 기계식 블라인드가 레일을 오가며 내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대신 고분자 분산형 액정(PDLC, Polymer Dispersed Liquid Crystals) 필름이 6단계로 변하며 투명도를 조절해 준다. 공포 영화에서 귀신이 카메라로 달려들 때처럼 디지털 점프를 한다. 깜깜한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는 시공간이라면 낭만적이기는 하겠다.
‘더 뉴 그랜저’는 ‘SDV 1호차’라는 멍에를 스스로 졌다. 절대 완성형이 나올 수 없는 ‘1호’의 사명을 ‘그랜저’라는 완성형 이름에 떠맡겼다. 그랜저도 그 부담을 알고 있다. TV 광고에서 이런 카피를 썼다. “달콤한 성취감과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속삭임 사이, 악마는 바로 거기에 있다”라고. /100c@ose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