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런 촛불 아래 화가는 돈을 셌다 [화폭역정 14]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6월 05일, 오전 08:02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촛불 앞의 막달라 마리아’(1640년경). 어둠과 촛불의 세계를 다룬 라 투르의 작업 중 정적과 명상을 가장 완벽하게 시각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화려한 과거를 뒤로하고 광야의 동굴로 들어가 평생 참회하며 살았다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이야기가 배경이다. 카라바조 등 당대 바로크 화가들의 종교미술, 특히 성인의 참회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 으레 보이던 격정적인 감정이 없다. 대신 상징·은유를 내세운 극도의 절제를 선택했는데, 오히려 한 단계 높고 깊은 성찰이 배어나온다. 캔버스에 유채, 128×94㎝. 루브르박물관(프랑스 파리) 소장.
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작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어두운 방에 한 여인이 책상을 앞에 두고 비스듬히 앉아 있다. 차분히 뒤로 넘긴 긴 머리채는 등을 따라 어둠 속으로 흘러내린다. 어깨를 드러낸 흰 블라우스 사이로 드러난 우윳빛 살결 위로는 촛불에서 번져나온 빛이 머무르고 있다. 여인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은 무릎 위 해골에 얹고 있다. 책상 위에는 촛불 외에도 성서로 짐작되는 두툼한 책 두 권과 나무십자가, 흘러내린 밧줄이 놓였는데, 그 밧줄의 한쪽 끝은 여인의 허리를 감고 있다. 허리의 밧줄은 ‘고행대’라 불리던 것이고, 책상의 밧줄은 작은 채찍이다. 여인은 촛불 앞에서 지난 삶을 고통스럽게 회개하는 중이다.

◇어둠 막아선 촛불…깊고 고요한 명상세계

17세기 프랑스 로렌 출신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1593~1652)의 그림은 깊고 고요한 명상으로 이끌어가는 힘을 가졌다. 그 힘은 어둠을 막아선 ‘촛불’에서 나온다. 이 그림 ‘촛불 앞의 막달라 마리아’(1640년경)는 라 투르가 그린 모든 촛불 그림 가운데서도 가장 인상적이다. 길게 타오르며 올려보내는 가느다란 그을음, 그 그을음의 곡선이 그림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요소다. 여인의 얼굴은 촛불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고, 촛불의 빛은 이마와 한쪽 뺨, 양팔의 가장자리만 비추고 그 너머의 모든 것을 어둠 속에 잠기게 했다. 가장 큰 궁금증을 자아내는 해골은 곧 거울이다. 결국 얼굴이 어떻게 사라져 갈 것인지를 비춰주니 말이다.

이토록 신비로운 상징과 빼어난 은유를 잔뜩 품고 있는 그림을 바라보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궁금해지지 않겠는가. 이 화면을 만든 붓의 주인은 과연 어떤 영혼을 가진 사람일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세계미술사를 통틀어 이 정도의 핵폭탄급 반전이 또 있을까. 고매한 인격의 화가를 예상했건만 라 투르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였다. 떵떵거리고 거들먹거리는 망종이었으며, 사냥개를 몰고 다니며 남의 농토 짓밟기를 일삼는 망나니였다. 소문에는 그가 분노한 이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얘기도 있었으니 그의 평소 행태가 어땠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라 투르의 일생은 그 자체로 일대의 모순이었다. 1593년 로렌 공국(프랑스 북동부)의 작은 도시 빅쉬르세유에서 한 제빵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화가로서의 재능과 동시에 신분 상승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1617년 루네빌 공국 부유한 재무관리 딸과의 혼인은 그를 단숨에 신분의 사다리에 올려태웠다. 부인의 가문은 공국의 재정을 관할해 오던 명문이었고, 막대한 지참금은 라 투르에게 화가로서의 자유와 더불어 자산가로서의 입지까지 마련해 줬다.

루네빌에 정착한 1620년 라 투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로렌 공작 앙리 2세에게 탄원을 올린 것이다. “이 지역에 나만한 일류 화가가 없으니 그 지위에 걸맞은 세금 면제를 해달라”는 청이었다. 자신을 ‘일류 화가’라 지칭한 당당함도 놀랍거니와 그 ‘일류 화가’를 곧장 면세 청원의 근거로 들이댄 발상은 상대를 당황스럽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은 그의 재능을 인정해 청을 받아들였고 이후 라 투르는 평생토록 단 한 푼의 지방세를 내지 않았다. 라 투르는 이 면세 특권을 곧 토지 매입과 곡물 거래의 발판으로 삼았고 루네빌에서 가장 비싼 부동산을 사들인 자산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점쟁이’(1630년경). 촛불이 등장하는 야경화 이전에 제작한 ‘낮의 그림’ 중 한 점이다. 멋지게 차려입고 거만한 자세로 서 있는 젊은이(중앙)는 점쟁이(오른쪽 끝)의 말에 정신이 팔려 주머니가 털리는지도 모르고 있다. 거짓과 속임이 난무한 세상의 일면을 꿰뚫어낸 풍속화면서 세태화다. 캔버스에 유채, 101.9×123.5㎝. 메트로폴리탄미술관(미국 뉴욕) 소장.
1630년대 로렌이 30년전쟁의 참화로 페스트와 기근에 시달리던 시기, 라 투르는 자신의 너른 토지에서 거둔 곡식을 굶주린 이웃에게 풀기는커녕 창고에 가둔 채 가격이 폭등하기를 기다렸다. 당장 끼니가 없어 찾아온 이들에게는 곡식과 돈을 빌려주고 제때 갚지 못한 그들의 집과 땅을 강제로 압류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과는 별개로 1626년 행정기록은 이보다 더한 내용을 적고 있다. 루네빌 당국이 자물쇠 장수를 고용해 라 투르의 곡식 창고 자물쇠를 부순 뒤 그 안의 곡식을 굶주린 빈민들에게 나눠준 일, 라 투르가 어떤 사람에게 발길질과 몽둥이질을 해 1642년, 1648년, 1650년에 걸쳐 세 차례나 송사가 벌어졌다는 일 등을 말이다.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651년에도 한 농부를 죽을 만큼 두들겨 팼던 일도 있다.

라 투르의 사인이 흉막염이란 것이 공식 사망기록에 적혀 있지만 실은 그해 루네빌을 휩쓴 역병으로 그 집안의 여덟 사람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는 게 오늘날 학계의 정설이다. 그 역병으로 루네빌에서 8000여 명이 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보다 더욱 믿고 싶었던 풍문이 있었으니 “라 투르가 맞아 죽었다더라”였던 것이다. 원한을 산 이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렇게라도 응징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실 ‘맞아 죽었다’는 것보다 더 큰 형벌은 따로 있다. 라 투르가 죽은 뒤 한 세대가 채 가기도 전에 그의 이름, 그의 그림이 함께 잊혀 300년 가까이 호명되지 않았던 일이다. 라 투르의 작품이 제대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915년 이후부터다.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그림 ‘납부금’(1630∼1635년경)이 가진 미술사적 의의는 상당하다. 라 투르가 진짜 살았던 현세의 풍경을 이 한 점에 그대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여섯 명의 사내가 한 책상을 둘러싼 채 빽빽하게 모여선 장면이 시작이다. 화면 정중앙에 황금빛 비단 소맷자락을 빛내는 한 사내가 가느다란 양초를 손에 쥔 채 책상 한가운데로 불빛을 기울여 비추고 있다. 그가 비추는 것은 누군가의 얼굴이 아니다. 책상에 쌓아 올린 한 무더기의 은화, 동전 몇 닢을 흘려 놓고 있는 가죽 돈주머니, 동전의 무게를 가늠하는 작은 손저울의 막대, 그 아래에 펼쳐 놓은 회계장부다.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납부금’(1630∼1635년경). 낮의 풍속화를 그리던 라 투르가 촛불을 밝히면서 시작한 야경화 연작의 첫 단추가 된 작품이다. 이후 촛불은 종교적 명상의 정점을 찍지만 사실 그 출발은 ‘돈이 오가는 책상’ 위였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드러냈다. 고리대금업자로 악명 높던 라 투르가 채무자를 닦달한 자신의 일상을 옮겨놓았다고 후대는 분석한다. 캔버스에 유채, 99×152㎝. 리비우국립미술관(우크라이나 리비우) 소장.
양초를 쥔 그 사내 앞쪽으로는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 가진 것의 전부일 듯한 작은 동전들을 내놓고 있다. 노인의 얼굴은 촛불을 정면으로 받아 가장 또렷이 드러나는데, 표정에는 체념이 묻어 있다. 화면 가장 왼쪽 끝에는 붉은 망토를 두른 사내가 책상 위와 다른 사내들을 지켜보고 있고, 그 정면에 선 또 다른 사내는 차용증을 들고 소리내어 읽는 중이다. 화면 가장 오른쪽 끝에는 챙 넓은 모자를 깊이 눌러쓴 사내가 보이는데 아마도 이 거래를 지켜보는 입회인일 듯하다.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여섯 명의 인물 누구도 다른 인물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시선은 차용증이나 동전 등 각자가 보고 싶은 데로 흩어져 있을 뿐이다. 이 시선의 불일치를 통해 라 투르는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돈을 매개로 결박돼 있을 따름이란 것을 암묵적으로 내비쳤다. 결국 촛불이 비추고 있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 돈으로 환산되는 차가운 현실이었던 것이다.

◇‘숭고한 예술’과 ‘탐욕스런 실체’ 사이의 괴리

‘납부금’이 라 투르가 그린 야경화 연작의 첫 작품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후 그가 추적해 들어가게 될 ‘어둠과 촛불의 세계’는 종교적 명상과는 거리가 먼, 빚을 갚는 자와 빚을 받는 자의 책상 위에서 발화한 것이다. 후대의 미술사가들이 이 그림의 장면을 두고 라 투르가 매일같이 채무자를 자신의 책상 앞으로 불러들여 동전을 헤아리던 개인적 일상을 그린 것이라고 확신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촛불 앞의 막달라 마리아’와 ‘납부금’ 이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두 그림의 거리가 라 투르라는 인간이 가진 비밀의 깊이를 말해주는가 싶기도 하다. 작품을 만드는 손과 그 손을 가진 인간 사이의 거리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멀고 또 깊다. 물론 라 투르의 경우는 아주 까마득하게 멀고 깊었을 테다. 말년에 들어서며 막달라 마리아를 그린 라 투르는 작은 반성이라도 했을까. 아니면 전에 없던 새로운 구도를 만들었으니 ‘역시 난 천재’라며 즐거워했을까. 어쩌면 이 둘의 화해가 불가능한 그 자체가 라 투르의, 아니 인간의 삶일지도 모르겠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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