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를 위한 기회가 없는 사회, 괜찮을까[정덕현의 끄덕끄덕]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6월 11일, 오전 08:00

[정덕현 문화평론가]드라마 제작사에서 일하는 분을 만났다. 몇 년 동안 준비한 드라마가 엎어졌단다. 꽤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준비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조금 놀라웠다. 그만큼 드라마업계에 제작편수가 급감한 현실이 피부로 느껴져서다. 그런 일이 요즘은 비일비재하다는 그는 새 드라마를 다른 작가와 함께 준비 중이라고 했는데 필자는 그 엎어진 드라마가 궁금했다. 되살리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엎어진 드라마가 기사회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메인급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인데 배우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란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해진 현실을 실감하면서 그것이 비단 드라마업계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1등만 살아남는 사회가 아닌가. 그래서 2등을 하면 그 누구도 주목해 주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는 과연 괜찮을까.

2023년 개봉한 이병헌 감독의 영화 ‘드림’에는 늘 2등만 해서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축구선수 홍대(박서준 분)가 등장한다. 계속 축구를 할지 아니면 연예인으로 전직할지 고민하던 그는 기자 폭행으로 퇴출 위기에 처하자 ‘이미지 세탁’을 위해 홈리스 풋볼 월드컵 감독을 맡게 된다. 이 감독직에 영혼이 있을 리 없는 그지만 그는 홈리스팀 선수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변화한다. 1등이 아니면 2등을 해도 꼴찌처럼 시선조차 주지 않는 세상의 배제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온 그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사회에서 밀려난 홈리스 선수들에게 공감하기 시작한다. 가족을 돌보지 못한 과오를 지금이라도 씻기 위해, 이혼했지만 딸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기 위해, 사고로 실종됐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 연인을 위해 그들은 운동장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어떻게든 드러내려 애쓴다. 그들과 함께 브라질에서 열리는 홈리스 월드컵에 참가한 홍대는 막강한 서양선수들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는 한국대표팀 선수들에게 1등이나 우승이 아니라도 가치 있는 결과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이런 말로 강변한다. “기록을 남기러 왔는지 기억을 남기러 왔는지, 자 그건 선수들이 판단합니다.”

영화 ‘드림’의 이야기는 2010년 브라질 홈리스 월드컵에 출전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실화가 소재다. 당시 대회에서 한국팀은 11전 1승 10패를 기록했지만 관객들의 압도적인 응원을 받았다. 외국 관객들이 “코리아, 코리아”를 외치는 뭉클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유는 우승이 아니라 부상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뛰고 또 뛴 선수들의 열정에 대한 열광이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이 대회의 의미를 가장 잘 살렸다는 이유로 2010 홈리스 월드컵 최우수 신인팀상을 수상했다.

이 실제 이야기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우리 사회도 ‘홈리스 월드컵’같은 밀려난 이들이 새로 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승자 독식 사회는 그렇게 1등만을 세우고 나머지는 지워버린다. ‘홈리스 월드컵’에 출전해 완벽한 패배를 기록했지만 인간 승리의 감동을 안긴 그들의 스토리는 승자만이 사회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들의 스토리가 영화로도 제작돼 많은 관객의 공감을 얻지 않았던가.

최근 개봉한 영화 ‘와일드 씽’은 한때 가요 차트 1위를 기록했지만 표절 의혹 한 방으로 나락 간 혼성그룹 트라이앵글이 20년 만에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코미디를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한국 사회에서 한 번 밀려난 이들이 다시 설 수 있는 무대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가 느껴진다. 코미디로 그려지긴 했지만 지방공연의 무대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무대에 오르는 이들의 절실함은 웃음 뒤에 짠한 현실의 씁쓸함을 남긴다.

어쩌다 한국 사회는 1등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돼버렸을까. 꼭짓점의 꼭대기에 선 1인만이 기억되고 나머지는 잊히는 풍경은 이제 오디션 프로그램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됐다. 몇 년을 치열하게 쓰고 회의하고 다시 쓰는 과정을 거듭하던 작품도 한 번 엎어지면 다시 설 기회를 잃고 버려지는 현실이 그것이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K콘텐츠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콘텐츠들은 살아남은 1등들뿐이고 그 뒤에 포진한 2등들은 아예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시대. 과연 이런 광경을 두고 K콘텐츠 운운할 수 있을까.

정부가 지원하는 콘텐츠 공모 사업을 들여다봐도 이러한 승자독식의 시스템이 엿보인다. 당선된 해에 성과를 내야 지원이 가능하다는 공모의 요강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이러한 공모 사업들은 사실상 이미 자리를 잡은 제작사들만의 것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작품 하나를 기획해 실제 제작하는 데 1년 넘는 시간이 훌쩍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니 이미 정해진 순서대로 반복적으로 작품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대형 제작사들만이 이러한 공모 사업의 실질적인 수혜자가 될 수밖에 없다. 공모를 염두에 두고 기획해서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획해서 제작하는 작품을 공모에 올려보는 정도인 것이다. 그러니 공모에서 떨어져도 대형 제작사들은 해당 작품을 제작하지만 그렇지 못한 제작사들은 제작을 포기하기도 한다.

어째서 우리는 1등이 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회를 마련하지 못하는 것일까. 한번 미끄러졌다고 다시 뛸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지 않는 사회는 과연 온당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각종 공모에서 1등을 한 이들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떨어진 이들을 위한 재기의 발판 또한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다못해 공모 낙선작들을 그냥 버릴 게 아니라 인큐베이팅 하는 시스템을 고안하는 식의 생각들을 왜 시도조차 하지 않을까. 도대체 왜 그럴까. 1등보다 더 많은 다수가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이 사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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