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땅에 다시 피어난 푸르른 희망…의성산불 1년 2개월, 주왕산에 가다 [여행]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6월 12일, 오전 06:01

작년 4월 의성산불 진화 직후 경북 청송 주왕산의 모습(좌)과 1년 2개월 후인 5월 28일 새순이 많이 자란 주왕산의 모습(우) (사진=주왕산국립공원사무소·이민하 기자)
[청송(경북)=글·사진 이데일리 이민하 기자] 화마가 주왕산을 할퀴고 간 지 1년 2개월이 지났다. 지난해 3월 22일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불은 도로와 마을을 넘어 3월 25일 오후 6시 20분 청송 달기약수탕 일원으로 산불이 최초 진입한 후 주왕산의 능선과 계곡을 단숨에 삼켰다. 봄가뭄에 바싹 마른 소나무가 불쏘시개가 됐고 주불은 약 6일이 지나서야 잡혔다.

경북 청송에 위치한 주왕산으로 가는 길. 차창 밖으로 검게 그을린 능선이 길게 스쳐 지나갔다. 불에 그을려 적갈색으로 말라죽은 소나무가 비탈마다 빼곡했다. 그리고 그 검은 자리 위로 누가 붓끝으로 찍어놓은 듯 연둣빛 새순이 반짝였다. 죽음의 빛과 생명의 빛이 한 비탈에 포개져 있었다. 자연은 상처를 감추는 대신 그 위에 새 살을 틔우는 쪽을 택한 듯했다.

경북 청송 주왕산 절구 폭포 (사진=이민하 기자)
◇돌의 산, 불을 견디다

주왕산(周王山)의 ‘주왕’은 사람의 이름이다. 본래 바위가 병풍을 두른 듯하다 하여 석병산(石屛山)으로 불렸다. 당나라 때 주도(周鍍)라는 인물이 스스로 ‘주왕’이라 칭하며 장안을 치다 패한 뒤 이 산까지 쫓겨 들어와 숨었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신라 왕자 김주원이 은거한 데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왕산은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암산(岩山)으로 꼽힌다. 산을 이루는 바위는 대부분 화산재가 쌓여 굳은 응회암이다. “강도가 가장 약한 축에 드는 돌이라 돌산이지만 암벽 등반은 못 합니다. 때리면 부서지거든요.” 유상협 국립공원공단 해설사가 계곡 바위를 짚으며 말했다. 무르기에 깎였고 깎였기에 절경이 됐다. 협곡과 폭포, 기둥처럼 갈라진 주상절리가 모두 그 여린 돌이 오랜 세월 물과 바람에 패고 무너진 흔적을 보여준다.

2017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된 이 산의 깃대종은 둥근잎꿩의비름과 솔부엉이다. 깃대종은 국립공원의 생태를 대표하는 야생 동·식물이다. 둥근잎꿩의비름은 잎 한 장을 떼어 말렸다 심어도 다시 살아나는 바위에 붙어 사는 다육식물이다. 흥미롭게도 이번 불길 앞에서 산을 지킨 것 또한 이런 야생의 생명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계곡의 활엽수림이 천연 방화벽이 되어 능선을 타고 곤두박질치던 불길을 잠시나마 붙들었다. 무른 돌이 절경을 빚고 젖은 숲이 불을 막았다. 주왕산은 제가 가진 모든 무기로 화마에 맞선 듯했다.

경북 청송 주왕산 산자락에 위치한 대전사와 그 뒤를 지키고 있는 기암 (사진=이민하 기자)
산행은 대전사(大典寺)에서 시작됐다.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천년 고찰이다. 절 마당에 서면 기암이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 봉우리가 병풍처럼 뒤를 두르고 있다. 기암은 기이할 기(奇)가 아니라 깃발 기(旗) 자를 쓴다. 신라군에 쫓기던 주왕의 군사가 이 봉우리에 깃발을 꽂아 세력을 과시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화마가 대전사까지 밀려왔지만 야간에 투입된 116명의 진화 인력이 끝내 천년 고찰을 지켜냈다. 대전사를 등지고 계곡으로 드는 길, 산 중턱엔 불이 핥고 지나간 검붉은 자국이 그 날 밤의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듯했다.

주왕산 '용추폭포' (사진=이민하 기자)
평탄한 산길을 한 시간쯤 걸었을까. 주왕산의 하이라이트 ‘용추폭포’가 나타났다. 깎아지른 응회암 절벽 사이로 주왕계곡 물줄기가 세 번 몸을 던지며 떨어지는 3단 폭포다. 협곡을 이룬 응회암은 약 7000만 년 전 화산이 남긴 돌이다. 강한 계곡의 물줄기는 무른 응회암을 쉼 없이 두드리며 폭포가 조금씩 깎이고 있다.

변하는 건 폭포뿐만이 아니다. 유 해설사가 폭포가 만든 물웅덩이의 한 켠을 가리켰다. “여기가 원래 4m쯤 깊이로 파인 유명한 못이 있었는데 태풍 때 떠내려온 자갈 때문에 통째로 메워져버렸어요”라며 “다시 파내자는 말도 나왔지만 자연이 바꿔놓은 것이라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사람 눈엔 늠름한 절경이지만 자연에겐 아직 끝나지 않은 조각 작업인 셈이다.

경북 청송 주왕산 주산지의 물 속에서 사는 왕버들나무의 모습 (사진=이민하 기자)
◇물속에서 사는 법을 찾은 왕버들

산길을 넘어 주산지(注山池)로 향했다. 명승 제105호로 지정된 이 저수지는 조선 경종 무렵 농작을 위한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들어져 300년 동안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주산지의 주인공은 수면 위로 발을 담근 왕버들 수십 그루다.

경북 청송 주왕산 주산지의 물 속에서 사는 왕버들나무의 뿌리 (사진=이민하 기자)
본래 버드나무는 물속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지만, 이곳 왕버들은 다르다. 못에 물이 가득 차는 때가 1년에 채 석 달이 안 된다는 환경적 특징에 적응해 살아남았다. 물이 빠지는 동안 굵은 원뿌리 대신 옥수수 수염 같은 잔뿌리를 무수히 길러 잠깐 드러난 흙에서 숨 쉬고 양분을 빨아들이는 법을 익혔다. 그렇게 수백 년, 잠겼다 드러나기를 거듭하며 ‘물에서도 사는 나무’로 진화했다.

“일반 왕버들을 주산지에 심으면 다 죽어요. 살아남은 녀석의 씨를 받아 심어야만 살아납니다.” 김동민 국립공원공단 해설사의 말처럼 가장 오래 살아남은 나무가 가장 강한 나무임을 보여주듯 왕버들은 여유롭게 바람에 따라 나뭇잎을 살랑거렸다.

산불은 더 이상 드문 재난이 아니다. 산림청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평균 540여 건의 산불이 났다. 대부분은 입산자 실화나 논밭두렁·쓰레기 소각 같은 부주의에서 비롯된다. 지난해 의성에서 시작된 불은 그중에서도 유례가 없는 최악의 재난으로 기록됐다. 산림 피해만 약 9만 8000㏊, 2000년 동해안 산불(약 2만 4000㏊)의 네 배에 이르는 최대 규모 피해다.

잿더미가 된 숲이 본래 모습을 되찾는 길은 멀고 더디다. 주왕산국립공원사무소는 산불 이전으로 돌아가는 데만 약 50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사람에겐 아득하지만 산에겐 한 호흡과 같은 시간인지 모른다. 주왕산은 이미 그 긴 이야기의 첫 페이지를 쓰고 있었다. 검게 탄 땅을 비집고 올라온 한 줌의 작고 끈질긴 생명이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는 자연의 위대함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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