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잔류 시민' 공연 장면 (제공=서울연극협회)
지난 14일 폐막한 연극 '잔류시민'은 6·25 한국전쟁 도중에 부역자재판을 다룬다. 1950년 10월 서울이라는 배경은 옛날얘기를 예상했지만 그 거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벌어지는 사건을 마주하듯 불편하고 아프다. 초고 '재판관의 고민'을 10년 동안 방대한 자료와 삶 속에서 다듬은 작가 이양구의 끈질김 탓이다.
안내문 '이 극은 실제 사건과 인물을 모티브로 했으나 구체적인 인물이나 사건은 허구입니다'를 원망했다. 허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었다. 좌우 이념의 반복 때문이 아니라, 위기 때마다 국가와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구조’ 대신 ‘처벌하기 쉬운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 때문이다. 따라서 '~했으나 구체적인 인물은 성과 이름을 달리해 살아가고 있고 엇비슷한 사건이 현재도 벌어지고 있다'고 안내해야 옳았다.
작품의 주된 사건은 부역자 재판이다. 법의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무대 위 법정은 정의의 절차보다 보복의 장치에 가까웠다. 인민군한테 고추장 나눠줬다고 최하 징역 10년이었다. 굶지 않으려고 인민군의 내무서에서 심부름하던 16살 아이는 사형을 구형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합수본에 파견 나온 김병호 서울지방법원 판사는 골치덩어리였다. 다른 판사처럼 검사가 구형한 대로 판결하면 편할 일을 머뭇거렸다.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전쟁 직후의 법정이 생존과 부역을 한꺼번에 처벌하려는 속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부역자를 다루는 특별법은 생존 행위와 적극적 가담을 구별하지 못했다. 재판은 정의의 절차라기보다 전쟁 직후의 공포와 증오를 법정 언어로 바꾸는 행위에 불과했다.
연극은 검사가 김병호를 압박하기 위해 아내 오수인을 긴급 체포하면서 급박하게 흘러간다. 오수인은 풀려나지만, 병호의 동창이자 전 서울지법 판사 홍승호는 사형당한다. 또한, 명경숙은 김병호의 적극적인 현장 검증으로 경찰을 밀고했다는 누명에서 벗어난다.
김병호는 오히려 검사도 설득한다. 그는 "평범한 시민들의 본능적 생존행위에 이 엄청난 전쟁과 파괴의 책임을 귀속시키려는 그 특별 형법을 만드는 나라가 어떤 나라냐"고 묻는다. 이어 부역자들을 향해 "여러분이 저지른 행위가 전부 죄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민군은 도움을 얻었고, 그로 인해 누군가는 죽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은 죄보다 더 큰 처벌을 하라고 법이 요구할 수 없다"고 말하고 판결한다,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1950년 10월 서울의 부역자 재판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과정을 떠올리게 했다. 작가가 진상조사위에서 일했기에 더 그러했다. 두 사건은 분명하게 별개의 맥락이지만 과거의 책임을 묻는 과정이 어디까지 신중해야 하는지를 함께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지은 죄보다 더 큰 처벌을 하라고 법이 요구할 수 없다는 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연극 '잔류시민'은 시보다 소설에 가깝다. 말이 많은 희곡이라서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대사를 소화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소한 억양, 짧은 침묵만으로 극적 긴장감을 끝까지 끌고 간 것은 전적으로 배우들의 몫이다. 특히, 이 작품의 몰입감은 말에서 발생했다. 검사는 확신의 속도로 몰아붙였고, 강 판사는 체념과 냉소 사이에서 흔들렸다. 김병호가 침묵하거나 머뭇거릴수록 법정 밖의 폭력은 더 크게 들렸다.
무대 바닥을 가득 메운 전단지는 단순한 장식보다 기록의 잔해처럼 보였다. 누군가를 부역자로 만들고, 누군가를 증인으로 세우며, 누군가를 처벌 대상에서 시민으로 되돌리는 종이들이 무대 전체를 덮고 있다고 상상하자 아찔했다. 물어보니 A4용지 1만 7000장이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안경모 연출은 희곡의 많은 말을 덜어내기보다, 그 말들이 관객을 압박하도록 밀어붙였다. 경의를 표한다.
연극 '잔류시민'의 연극적 형식 역시 법정극의 외피에만 머물지 않는다. 재판 장면은 판결을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고, 증언과 회상, 압박과 침묵 사이를 오간다. 그 느린 우회가 관객에게도 같은 질문을 돌려준다. 단언컨대 누가 죄인인가가 아니라, 누가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죄를 물을 자격이 있느냐는 질문이다.
연극 '잔류 시민'
공연 기간 : 2026년 6월 6일(토) ~ 6월 14일(일)
공연 장소 : 대학로극장 쿼드
공연 시간 : 100분
창작진 : 작가 이양구, 연출 안경모, 무대 도현진, 조명 김영빈, 의상 오수현, 분장 이지연, 음악 윤현종
출연 : 이종무(김병호 서울지방법원 판사), 정원조(홍승호 전 서울지방법원 판사), 황은후(김병호의 아내 오수인), 백성철(군검경 합동 수사본부 소속 검사), 우범진(서울지방법원 강 판사), 이수진(서기), 황규찬(김병호의 큰아들), 최정화(잔류시민 여경자), 김진희(잔류시민 맹경숙), 김태완(경찰)
연극 '잔류 시민' 공연 장면 (제공=서울연극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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