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땅과 땅만 잇는 게 아니다. 그 길을 걷는 일은 결국 흘러간 시간의 자취를 더듬는 일이다. 또 길 위에서 살아온 이들의 완강한 삶과 마주하는 일이다. 잔잔한 다도해의 남파랑길이 서해의 거친 물길인 서해랑길로 제 몸을 바꾸는 남도의 끝자락. 전남 강진과 해남, 그리고 목포의 길을 걸었다. 그 먼 길 위에서 마주한 것은 박제된 풍경이 아니라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이어지는 인연의 서사였다.
해질 무렵의 전남 해남 두륜산 자락의 도솔암 전경
해질 무렵의 전남 해남 두륜산 자락의 도솔암 전경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코리아둘레길은 부산 오륙도에서 시작해 남해, 서해, DMZ를 거쳐 동해 고성까지 이어진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소리와 발끝의 촉감이 이미 마음을 남도의 푸른 바다 끝으로 등 떠밀고 있다. 한반도를 크게 한 바퀴 도는 이 여정의 첫걸음을 떼기 위해 남해안의 깊숙한 안쪽이자 옛이야기가 가장 짙게 배어 있는 전라남도 강진의 만덕산 자락으로 향한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1.3km의 오솔길은 아름드리 소나무의 굵은 뿌리들이 핏줄처럼 지상으로 드러나 있다. 고개만 들면 야생 차나무의 초록과 동백나무 숲이 빽빽하게 해를 가린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사그락거리는 서늘한 흙길이다.
전남 강진 다산초당 가는길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유교적 도그마에 갇히지 않았던 다산과 불가의 벽을 넘어 세상의 이치를 들여다보았던 초의. 두 사람은 나이와 신분의 차이를 넘어 이 서늘한 숲길을 오가며 외로움을 달랬다.
길의 중간쯤에서 숨을 고르면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 사이로 은은한 차 향기가 묻어나는 듯하다. 다산은 초의에게 주역과 유학을 가르쳤고, 초의는 다산에게 직접 덖은 잎차를 건네며 세상의 풍파에 상처 입은 학자의 마음을 성실하게 채워주었다. 두 천재가 시대를 건너뛰어 나눴던 깊은 교감은 이 숲길의 서늘한 그늘 속에 고스란히 고여 있다.
기와집으로 단정하게 복원된 초당 마당 한편에는 그들이 차를 끓이던 돌화덕 ‘다조’가 세월의 더께를 덮은 채 가만히 누워있다. 천일각 정자에 서면 멀리 구강포 바다가 툭 터져 내려다보인다. 다산이 저 멀리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약전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던 바다다. 풍경은 이토록 고요하다. 하지만 시대를 넘어선 그들의 자취는 지금도 여전히 귓가를 맴도는 듯하다.
전남 해남 땅끝마을 스카이워크전망대
전남 해남 땅끝마을 스카이워크전망대
◇바다가 몸을 바꾸는 땅끝
강진 구강포 바다를 따라 걷던 발길은 이내 해남의 동쪽 경계를 넘어 땅끝을 향해 내려간다. 이 여정의 허리를 가로막는 것은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전라도에서 가장 기괴한 산”이라 평했던 달마산의 웅장한 바위 능선이다.
신라시대 고찰 미황사의 보드라운 평지 마당에서 숨을 고른 뒤 기암괴석 사이로 길게 이어지는 달마고도의 거친 돌길을 밟는다. 숲길과 흙길, 그리고 너덜경의 거친 바위들이 번갈아 나타나는 산길을 지나 가장 가파른 벼랑 끝에 제비집처럼 들어앉은 암자 ‘도솔암’에 닿으면 푸른 다도해의 섬들이 비로소 발밑으로 내려앉는다. 웅장한 천년의 세월이 바위 자락마다 묵직하게 배어있는 길이다.
달마산의 바윗길을 내려와 마침내 땅끝탑 광장에 서면 이 길은 코리아둘레길이라는 거대한 선 속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전남 해남 땅끝전망대 가는 데크길
전남 해남 땅끝전망대
“절벽 끝인 줄 알고 왔는데 막상 와보니 새로운 바다로 열리는 문이었습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던 한 도보 여행자의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치열했던 여정의 끝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바다를 향해 첫발을 내딛는 설레는 시작의 자리다.
땅끝에서 서해랑길로 바통을 터치한 발길은 이제 해남반도의 서쪽 가장자리를 거슬러 오른다. 무수한 갯벌과 쉼 없는 마을 길을 지나 서해랑길 14코스인 황산면의 ‘오시아노 해변’에 다다르면 길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부드러워진다. 완만한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잔잔한 잔디밭과 해송 숲은 거친 산길을 헤쳐온 이들에게 주는 호사스러운 평탄함이다.
시야를 가로막는 빌딩 하나 없이 확 트인 수평선 너머로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서해는 이내 오렌지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거대한 낙조를 아낌없이 펼쳐 보인다. 잔잔하게 밀려드는 파도 소리를 배경 삼아 배낭을 내려놓는 순간, 몸에 쌓였던 피로가 서해의 붉은 물결 속으로 조용히 씻겨 내려간다.
전남 해남 오시아노리조트
전남 해남 오시아노 해변길
오시아노의 해변 길을 지나 해남의 마지막 자락을 빠져나오면 길은 영산강 하구언을 건넌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관문, 목포의 골목 안으로 서서히 스며든다. 탁 트인 자연의 길에서 인간의 시간이 촘촘히 쌓인 도시의 길로 풍경이 바뀌는 순간이다.
삼학도 수로길을 지나 유달산 자락의 근대화거리로 접어들면 길은 100년 전 개항기의 빛바랜 시간 속으로 이어진다. 웅장하지만 서글픈 붉은 벽돌의 옛 목포일본영사관과 군데군데 허리가 휜 일본식 가옥들은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날것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난영공원 고갯길에서 흘러나오는 고 이난영 여사의 애절한 목포의 눈물 멜로디가 유달산 바위 자락에 부딪힌다.
오늘날 목포의 진짜 매력은 상처 입은 과거와 청년들의 활기찬 현재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지역의 젊은 기획자들은 이 역사의 흔적을 허물어버리는 대신 감각적인 문화 공간과 카페, 그리고 게스트하우스로 재해석하며 거리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전남 목포 전경
전남 목포 김대중노벨평화상 기념관과 삼학도 전경
길은 목포의 오래된 골목 안에서 멈춘 듯 이어졌다. 200년 전 다산이 걸었던 강진의 흙길이나 대륙의 끝이자 시작인 해남의 갯바람, 그리고 청년들의 웃음소리가 서린 목포의 적산가옥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간의 풍파를 견뎌내는 중이다.
영화 1987 촬영지인 전남 목포 연희네슈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