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에 밀리고 가족에 태워지고 미술사서 지워지고 [화폭역정 16]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6월 19일, 오전 08:03

존 윌리엄 고드워드의 ‘사포의 시대’(1904). 신고전주의 회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고드워드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기원전 7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활동했던 전설적인 여성 시인 사포를, 그림을 바라보는 현재 시점으로 생생하게 불러냈다. 찬란하고 평화로운 고대의 한순간을 영원히 박제해 두고 싶은 염원이 읽힌다. 사포를 연기한 검은 머리의 모델은 고드워드의 뮤즈로, 작품에 연이어 등장하는 것은 물론 고드워드가 이탈리아 로마로 이주할 때도 동행했을 만큼 예술세계에 깊은 영감을 준 존재로 알려져 있다. 캔버스에 유채, 58.4×73.7㎝. 게티미술관(미국 로스앤젤레스) 소장.
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작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세상은 나 자신과 피카소를 동시에 담기에 충분하지 않다.”

1922년 12월 13일 영국 런던의 한 화실에서 61세의 화가가 가스를 틀어놓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유서에 적힌 것은 이 한 문장뿐이었다. 유서를 본 가족은 슬픔보다는 자살이 주는 수치심이 더 컸다. 화가를 기록한 모든 서류와 사진을 불태워버렸다.

영국 화가 존 윌리엄 고드워드(1861∼1922). 그의 사진은 물론 그와 관련된 서류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는 미스터리한 인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고드워드가 세상에 살 이유가 없다고 쓴 마지막 글에 ‘피카소’라는 이름을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자살을 선택한 1922년은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이미 ‘아비뇽의 처녀들’(1907)을 완성한 지 15년이 지난 해였고, 마르셀 뒤샹(1887∼1968)이 남성용 소변기를 구매해 ‘샘’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지 5년이 지난 해였다. 미술의 언어가 전복되던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유럽 전체가 새로운 것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고, 그 질주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퇴보가 아니라 존재의 소멸로 여겼던 시대였다. 영국은 그 변화의 진원지가 아니었지만 예외도 아니었다.

◇피카소 큐비즘 등 질주하던 새 시대에 홀로 맞서

고드워드가 태어난 1861년은 빅토리아 신고전주의 회화가 무르익던 때였다. 고고학적 발견과 더불어 그리스·로마의 세계를 정밀하고 화려하게 재현하는 화면들이 관객을 압도하던 시기에 그는 태어났다. 영국 회화에서 마지막으로 고전 부활이 꽃피운 1860년대였으며 이후 30년간 만개했으니 고드워드는 신고전주의의 운명을 떠안았다고 할 수 있다. 신고전주의 탄생과 동시에 태어나 그 경향의 가장 밀도 높은 화가가 됐으나 그 정점에서 쇠퇴하고 소멸해야 했던 것이다. 신고전주의의 거장들이 모두 사망한 뒤 고드워드는 홀로 남았다.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

게다가 고드워드의 부모는 그가 화가가 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억지로 직장을 갖게 했지만 그림을 계속 그렸고, 그가 이탈리아로 떠났을 때는 가족사진에서 그의 얼굴을 오려내기도 했다. 다른 형제에 비해 그는 부모의 ‘실패작’이었다. 그러니 자살을 수치스러워하며 모든 그의 흔적을 모조리 불살랐다는 것이 놀랄 만할 일도 아니었다. 가족에게 고드워드는 살아 있을 때도 이미 지워진 사람이다.

극렬한 부모의 반대에도 고드워드는 1887년 왕립미술원에 처음 그림을 출품한 이후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고고학자이자 화가였던 스승의 문하에서 고전세계의 재현에 필요한 학자적 엄밀함을 배웠다. 자신의 화실을 대리석 조각상과 고대 유물로 채워두고 건축양식과 고대 복식의 직조 방법, 장신구의 형태를 직접 확인했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상상이 아니라 고증이었고, 고대를 복원해 그 시대를 다시 사는 것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플라톤이 ‘열 번째 뮤즈’라 부른 고대 그리스 최고의 여성 시인 사포를 그린 ‘사포의 시대’(1904)가 그 마음 중 하나다. 사포를 연기한 검은 머리의 모델은 고드워드의 그림 속에 꾸준히 등장한다. 고드워드의 사포는 담담하게 정면을 바라보며 자신을 바라보는 자가 누구든, 백 년 뒤의 사람이든 천 년 뒤의 사람이든 자신을 소개할 수 있을 듯한 시선으로 앉아 있다. 산과 하늘, 장미 숲과 대리석 건물까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해 기원전 7세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바로 그 생생함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이토록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도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유명했다는 사포의 시가 그랬고, 한순간에 화산재로 뒤덮여버린 폼페이가 그랬듯이 말이다.

존 윌리엄 고드워드의 ‘폼페이 성문 밖에서’(1905). 화산재 아래 묻힌 고대 도시 폼페이를 상상을 넘어선 역사적 고증을 기반으로 복원했다. 주로 화실에서 여성 인물에 집중했던 다른 그림들과 달리 풍경과 인물, 서사를 완벽한 밀도로 결합한 야외 군상화다. 이탈리아를 처음 찾았을 때 받은 감동을 그대로 쏟아부으면서 결국 사라질 도시라는 비극적 결말을 희석했다. 캔버스에 유채, 71×91.5㎝. 개인소장.
‘폼페이 성문 밖에서’(1905)는 1904년 말에서 1905년 초 고드워드가 이탈리아를 처음 방문한 직접적인 결과로 보인다. 풍경은 매우 구체적이다. 사람이 다니는 도로와 마차가 다니는 도로를 구분했던 폼페이의 거리, 집집마다 심은 사이프러스 나무, 도로 위에 흩어진 비둘기들은 상상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밀도를 갖고 있다. 푸른색 신발끈이 풀려 도로 턱에 앉아 있는 여인은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벤치에 앉은 나이 든 남성은 뭔가 생각에 잠겨 있으며, 저 멀리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도 있다. 사라진 도시를 그린 이토록 평화로운 풍경이라니. 실제 폼페이는 로마 귀족의 휴양지 같은 곳이었다는 사실을 화가는 알았을 것이고, 말끔하고 풍요로웠던 과거를 꿈꾸며 경외하고 증명하려 했던 것 같다.

두 작품을 완성한 1904~1905년에 피카소는 파리에서 큐비즘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고 있었고, 마티스는 야수파의 언어를 벼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드워드는 그즈음 자신의 양식이 더 이상 환대받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왕립미술원 출품을 중단했다. 이후 그는 영국 화단의 공식적인 장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1912년 로마로 이주했고, 로마에서도 계속 그렸다. 자신이 그리는 세계가 실재하는 곳으로 갔던 것이다. 런던 화실에서 재현하던 고대를, 로마의 폐허에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고전과 고대를 사랑했던 고드워드가 그림과 삶의 경계를 아예 없애버리려 했던 것인가.

비평계는 고드워드를 포함한 신고전주의 화가들을 ‘대리석화파’라고 불렀다. 그들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우스꽝스러운 그리스의 옷을 입고 사는 현대인이라는 의미로 ‘토가를 입은 빅토리아시대 사람들’이란 더 가혹한 명칭을 붙였는데, 그야말로 ‘시대착오적 멍청이들’이라는 모욕이었다. 그러한 조롱은 고드워드의 학자적 태도, 정밀함을 유지하는 역사적 고증을 중요시했던 주제의식을 통째로 무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살 수치스러워 한 가족, 사진 등 흔적 싹 불살라

고드워드는 생을 마감하기 한 해 전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돼 런던으로 돌아왔고 별다른 작품을 남기지 못한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이후 20세기 내내 그의 그림은 잊혔다. 모더니즘의 세기 전체가 그의 이름을 밟고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드워드의 이름이 갑작스레 거명되는 일이 벌어졌다. 1995년 뮤지컬 ‘캣츠’ ‘오페라의 유령’ 등을 쓴 유명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소더비경매에서 그의 그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함’(1904)을 구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미술사가 고드워드를 지워버린 지 70년 만이었다. 유명인이 사들인 작품에 대한 정보가 퍼져 나가고 기사가 뒤따랐다. 세상이 처음 들어보는 이 화가와 작품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존 윌리엄 고드워드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함’(1904). 고드워드라는 화가와 작품을 암흑기에서 건져 올린 부활의 신호탄과 같은 그림이다. 1995년 뮤지컬계 거장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소더비경매에서 사들이면서 미술사에서 완전히 지워졌던 고드워드를 70년 만에 세상에 알렸다. 이후 갈수록 복잡해지고 현란해지는 현대미술에 ‘직관적으로 아름답고 편안한 위로’를 건넨 그림으로 대중에 퍼져 나가며 고드워드 작품 중 가장 유명해졌다. 캔버스에 유채, 50.8×76.2㎝. 개인소장.
이 일은 시작일 뿐이었다. 뒤이어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고드워드의 그림은 소셜미디어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세계로 퍼져 나갔다. 미술사의 허락을 받을 필요 없이 대중이 직접 그의 아름다운 화면을, 이미지를 보관했다. 오늘날 고드워드의 작품은 안타깝게도 먼저 알아본 이들의 거실에 주로 흩어져 있지만 미국의 게티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영국의 대영박물관에도 다수 소장돼 있으며 그의 이름은 살아 있을 때보다 더욱 알려져 있다.

사실 그랬다. 세상은 고드워드를 피카소와 동시에 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세상’은 잠깐이었다. 피카소가 지나간 자리에 전혀 예상치 못한 대중의 시대가 열렸고 여기서 고드워드의 그림이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다. 화가는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사랑한 세계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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