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장구한 파멸'
시집 '장구한 파멸'은 알고리즘이 신성처럼 작동하는 시대의 인간 파멸과 그 틈에서 남는 공상의 자리를 함께 밀어 올린다. 윤의섭은 여덟 번째 시집에서 '종말 중'으로 시작하는 네 개 장의 시편을 따라 영원한 현재에 갇힌 삶과 그 안의 잔여를 짚는다.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시대, 알고리즘은 인간의 데이터를 잘게 나누고 맥락을 지운다. 이 시집은 그 과정에서 삶이 역사성을 잃고 파편으로 남는 장면을 앞세운다. 인간이 늘 현재에만 묶인 채 파멸 중이라는 감각이 초반부터 강하게 깔린다.
첫 장 제목을 '종말 중'으로 잡은 것도 같은 문제의식을 밀어 올린다. 여기서 종말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일상에 이미 스며든 상태다. 불안과 소멸은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하루의 표정처럼 배치된다.
시집은 이 파멸을 단순한 폐허의 묘사로만 끌고 가지 않는다. 윤의섭은 알고리즘이 세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하는 '공상'을 인간성의 잔여로 세운다. 효율과 성장, 수익의 언어가 밀어낸 자리에서 공상은 끝내 지워지지 않는 감각으로 남는다.
그 잔여는 여러 시편의 장면으로 구체화한다. '폐타이어의 자세'에서는 버려진 사물이 바닥에 누운 채 별자리를 만들고, '서바이벌'에서는 믿기 어려운 결말을 향해 탈출선에 몸을 싣는 인간의 모습이 나온다. 계산 바깥에 남은 사물과 몸짓이 이 시집의 저항선이 된다.
구성도 문제의식에 맞춰 움직인다. '종말 중'에 이어 '징조의 언덕', '기적 또는 적기', '종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네 개 장은 징후와 감각, 생존의 흔적과 말미의 폐색을 차례로 묶는다. '누설', '카르만 라인', '음속', '폐타이어의 자세' 같은 작품은 그 흐름 속에서 공상과 환청, 불연속의 감각을 서로 다른 결로 밀어낸다.
윤의섭의 시 세계는 이번 책에서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 1994년 '문학과 사회'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그는 죽음과 소멸의 감각을 꾸준히 다뤄 왔고, 이번 시집에서도 그 궤적을 현재의 기술 환경으로 옮겨 놓는다. 불안의 근원을 초월적 질서보다 세속의 알고리즘에서 찾는 점이 이번 책의 선명한 이동이다.
그래서 '장구한 파멸'이 붙드는 질문은 종말의 예고가 아니라 지금 어떤 방식으로 인간다움을 보존할 수 있느냐다. 공상, 환청, 버려진 사물의 자세처럼 측정되지 않는 잔여를 끝까지 남겨 둘 수 있는지가 이 시집의 끝에 남는다.
△ '장구한 파멸'/ 윤의섭 지음/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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