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의 여지'는 사흘이면 색과 향, 맛이 변하는 생여지를 영남에서 장안까지 옮기라는 황명을 따라가며 당 현종 말기의 권력 구조를 파고든다.
'장안의 여지'는 사흘이면 색과 향, 맛이 변하는 생여지를 영남에서 장안까지 옮기라는 황명을 따라가며 당 현종 말기의 권력 구조를 파고든다. 저자 마보융은 말단 관리 이선덕의 십일 일에 빚과 가족, 벌목과 노역의 대가를 겹쳐 역사 한 문장 뒤에 가려진 삶을 끌어낸다.
황궁은 양귀비의 탄일에 맞춰 여지를 바치라고 명하고, 말단 관리 이선덕은 새로 만든 '여지사' 자리에 임명된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여지전'이 아니라 사흘만 지나도 색과 향, 맛이 달라지는 '생여지'를 옮겨야 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임무는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가 된다. 막 빚을 내 집을 마련한 이선덕에게 이 명령은 출세의 기회가 아니라 가족의 생계까지 흔드는 압박으로 다가온다.
황명이 내려앉는 자리, 말단 관리의 생존
파견직은 황제의 명을 직접 수행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명예와 부로 가는 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겉모습을 오래 붙들지 않는다. 여지사라는 이름 아래 내려온 것은 책임만 남기고 위험은 아래로 밀어내는 권력의 구조다.
사건의 긴장은 여지의 속성에서 곧바로 솟아난다. 하루가 지나면 색이 변하고, 이틀이면 향이 변하고, 사흘이면 맛이 변하는 과일을 오천 리(약 2000km) 떨어진 영남에서 장안까지 보내야 한다. 이선덕은 운송로와 재배지, 지방 관리와 농장을 훑으며 방법을 찾지만 출발선부터 시간이 모자란다.
가족을 지키려면 합의이혼이라도 서둘러야 한다는 조언이 따라붙는 대목은 이 임무의 무게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실패를 예감한 영남의 총수 하이광은 쉽게 손을 내밀지 않고, 하급 관리 조신민은 이선덕의 성패를 기회로 삼으려 한다. 빠져나갈 길도, 기대댈 인맥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끝내 현장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여지 한 알에 얹힌 사람들의 노동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소설의 시선은 황궁보다 현장에 오래 머문다. 지역 관리와 농장 주인, 노비와 기수, 말과 배가 모두 여지 한 알의 운송망 안으로 들어온다. 화려한 당나라의 겉면보다 그 체제를 떠받치는 하층의 노동과 긴장이 전면으로 나온다.
농장 사람들은 도시에서 온 이들이 자신들을 거의 개 보듯 대한다고 말하고, 이선덕은 자신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돌아본다. 상대를 업신여기는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지 않고, 체제 안을 떠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번지는 장면이다. 말단 관리와 현장 노동자가 각기 다른 위치에서 같은 모멸을 견디는 구조가 드러난다.
그 와중에 신선한 여지를 처음 맛보는 장면은 결이 다른 숨을 넣는다. 오랫동안 분주하게 일만 하느라 정작 여지를 먹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임무의 대상이던 과일은 처음으로 감각과 생명의 대상으로 돌아온다. 추격전처럼 흘러가던 이야기에 잠깐의 온기와 인간적 망설임이 스민다.
양귀비의 웃음 뒤에 남는 비용
소설이 끝내 계산하는 것은 운송 성공 여부만이 아니다. 생여지 두 단지를 장안으로 보내기 위해 다 자란 나무가 베이고, 과수원에 쏟은 두 해의 수고가 허물어진다. 위험한 길을 달린 기수와 쓰러진 말, 강 위에서 부러진 노와 목숨을 잃은 사람들까지 여지 운송의 대가로 호출된다.
윗선의 명령은 일선의 고충을 거의 헤아리지 않는다. 명령이 지나치다는 판단이 서도 여지사 같은 말단 관리가 거스를 힘은 없다. 벌목을 멈추면 운송대는 출발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모든 책임이 아래로 떨어진다는 사실이 이선덕을 더 옥죈다.
이 대목에서 여지 한 알은 궁중의 진상품을 넘어 권력이 소비하는 노동의 총량으로 바뀐다. 조정의 책임 회피, 백성의 노역과 세금, 현장의 희생이 한 과일의 신선함에 겹겹이 포개진다. 양귀비의 한순간 기쁨이 어떤 비용 위에 서 있는지 소설은 끝까지 밀어붙여 묻는다.
당나라 이야기로 비춘 오늘의 직장 현실
이선덕의 사투는 역사소설의 배경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치솟는 물가와 불안정한 일자리, 박봉과 높은 세금, 집 한 칸 마련의 압박 속에서 매일을 버티는 직장인의 모습이 그 위에 겹친다.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장악하지 못하는 감각이 소설의 현재성을 만든다.
주인공은 자신이 만든 적 없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이리저리 뛰고, 실패의 책임은 가장 약한 자리에서 감당한다. 돈도, 인맥도, 빠져나갈 방법도 마땅치 않은 처지에서 그가 붙드는 것은 끝내 사람들의 호의와 자신의 버팀뿐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황제와 귀비의 사치보다 일하는 사람의 피로와 불안을 더 오래 남긴다.
마보융은 2005년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첩보소설 '풍기농서'로 데뷔했고, 인민문학상과 주자청 산문상, 마오둔 신인상, 준마상을 받았다. '삼국기밀'과 '장안 24시', '장안의 여지' 같은 작품은 영상화돼 널리 알려졌다. 기록된 역사 한 문장에 가려진 사람들의 삶을 끌어내는 작가의 관심이 이번 작품에서도 선명하게 이어진다.
△ '장안의 여지'/ 마보융 지음/ 임주영 옮김/ 348쪽
'장안의 여지'는 사흘이면 색과 향, 맛이 변하는 생여지를 영남에서 장안까지 옮기라는 황명을 따라가며 당 현종 말기의 권력 구조를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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