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중 국군의 한강 인도교 폭파 [김정한의 역사&오늘]

생활/문화

뉴스1,

2026년 6월 28일, 오전 06:00

1950년 피난민들이 폭파된 한강 인도교 대신 놓인 부교를 통해 강을 건너는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2016.6.19/뉴스1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거대한 폭음과 함께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 북한군의 진격을 늦춘다는 군사적 목적하에 단행된 이번 폭파는, 정작 피난길에 올랐던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을 사지로 몰아넣은 참사로 기록됐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대외적으로 "수도를 사수하겠다"는 거짓 방송을 반복하며 시민들을 안심시켰다. 정작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은 이미 대전으로 특별열차를 타고 도망친 후였다. 정부의 말을 믿고 서울에 머물거나 뒤늦게 한강으로 몰려든 시민들은 국가의 배신 속에 적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인도교 폭파로 인해 다리 위를 가득 메웠던 차량과 피난민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으로 추락했다. 이때 발생한 사망자는 최대 800명으로 추정된다. 또한 강북에 남겨진 50만 서울 시민은 순식간에 퇴로가 차단된 채 고립됐다. 군사적 필요성을 감안하더라도, 민간인의 대피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조급하고 무책임한 작전이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참사 이후 여론이 극도로 악화하자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추악한 '죄 떠넘기기'를 시작했다. 정부는 폭파의 실질적 명령 계통에 있던 수뇌부를 보호하는 대신, 현장에서 명령을 수행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웠다.

최 대령은 적전적대행위(적 앞에서 아군에게 해를 끼친 행위)라는 억지 죄목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두 달 만인 9월 사형에 처해졌다. 최고 권력자들의 작전 실패와 무능을 하급 장교 한 명의 희생으로 덮으려 한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였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묻힐 뻔한 이 왜곡된 진실은 1964년 재심을 통해 최창식 대령이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다.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은 단순히 다리 하나를 파괴한 작전이 아니었다. 자신의 안위만을 챙긴 채 국민을 기만하고 버렸으며, 그 과오마저 부하에게 떠넘긴 대한민국 초기 정부의 도덕적 파산을 상징하는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 있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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