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학경·구정아·김옥선이 누군지 안다면…현대미술 작가와 작품을 다시 읽다

생활/문화

뉴스1,

2026년 7월 02일, 오전 09:01

'어느 날 장미가 사라졌다'는 기술 자본주의가 지워가거나 잊도록 강요한 감각과 관계의 흔적을 동시대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업으로 더듬는다.

'어느 날 장미가 사라졌다'는 기술 자본주의가 지워가거나 잊도록 강요한 감각과 관계의 흔적을 동시대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업으로 더듬는다. 저자 박보나는 도리스 살세도, 차학경, 구정아, 김옥선 등의 작품과 문학·영화 레퍼런스를 함께 엮어 상실의 시대를 버티게 하는 감각의 회복과 확장된 우정을 짚는다.

책이 붙드는 상실은 분명한 사건 하나에서 생긴 결핍이라기보다 막연한 쓸쓸함과 무기력에 가깝다. 박보나는 최근 몇 년간 젊은 작가들의 작업을 관통하는 정서가 사라짐에 대한 관심이라고 보고, 그 정체를 실제로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잊기를 강요받은 것에서 찾는다.

이 질문은 물리적 감각 경험이 점점 희미해지는 시대 인식과 맞물린다. 수많은 정보와 기술이 경험을 대신하는 자리에서 무엇이 빠져나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 책의 출발점이다.

제목의 '장미'는 오가와 요코의 소설 '은밀한 결정'에서 끌어온 상징이다. 권력자가 제거를 명령한 대상이라는 설정을 빌려 강요된 상실을 가리키면서도, 저자는 사라지는 세계에서 끝내 건져 올려야 할 감각과 가치를 함께 떠올린다.

책은 4부 15편의 글로 이런 문제의식을 펼친다. '실제의 틈', '확장된 우정', '세계의 구멍', '다정한 속도'라는 묶음 아래에서 감각, 만남, 연결, 노동, 상상, 읽기 같은 단어가 반복해서 호출된다.

1부에서 두드러지는 축은 몸의 감각이다. 구정아의 작업을 따라가는 대목에서는 냄새와 후각이 기억을 다시 불러오는 통로로 제시되고,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논의를 끌어와 세계를 먼저 느끼는 몸의 자리를 짚는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을 다루는 장에서는 현재의 꿈과 전생, 산 자와 죽은 자, 과거와 미래가 겹쳐지는 다중 세계가 나온다. 저자는 이 복잡한 시공간을 통해 우리가 놓친 연결의 상상력을 다시 호출한다.

2부는 관계의 감각을 더 가까이 끌어온다. 박보나의 퍼포먼스 '버튼과 문턱'은 도슨트와 미화원, 시설팀 노동의 흔적이 남은 미술관 바깥과 구석을 따라가며 전염병 시기 이후 잊힌 체온과 접촉의 감각을 복원한다.

김옥선의 사진을 읽는 대목에서는 서로 만난 적 없는 존재들이 사진을 매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전면에 선다.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얼굴은 관객과의 거리를 줄이고, 연결의 범위를 다시 묻게 한다.

그 범위는 인간 사이에만 머물지 않는다. 책은 사회의 가장자리에 놓인 존재들에서 더 나아가 비인간 동물과 감정이 프로그래밍된 디지털 유기체까지 시야를 넓히며, 위계화한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어느 날 장미가 사라졌다'는 기술 자본주의가 지워가거나 잊도록 강요한 감각과 관계의 흔적을 동시대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업으로 더듬는다.

3부에서는 작은 생명과 비주류의 자리를 둘러싼 시선이 두드러진다. '미안해요, 할머니'는 이영희 할머니의 싸움을 통해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가를 묻고, 로맹 가리의 '하늘의 뿌리'와 맞물려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비춘다.

박이소를 다룬 글은 더 작고 약한 것을 중심으로 옮겨놓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재활용 각목에 물꽂이를 해주는 장면에서 출발해 자본과 권력이 정한 중심질서 밖의 목소리를 어떻게 다시 들을 것인지로 나아간다.

4부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이다. 차학경의 '눈 먼 목소리'와 '딕테'를 읽는 장에서는 문법적으로 비껴가고 낯설게 거리를 두는 시적 언어가 분열된 정체성과 이방의 감각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살핀다.

문학과 영화를 나란히 읽는 방식도 책의 중요한 축이다. '블레이드 러너', '하늘의 뿌리', '화씨451',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같은 레퍼런스를 현대미술과 겹쳐 읽게 하면서 작품 사이의 문턱을 낮춘다.

이런 서술의 바탕에는 저자의 이력이 놓여 있다. 박보나는 미술가로 영상, 사운드, 퍼포먼스와 텍스트를 결합한 작업을 해왔고, 아시아 태평양 현대미술 트리엔날레와 광주비엔날레 등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으며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왔다.

책이 겨누는 현재는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 거대한 자본이 더 많은 노동과 자리를 대체하는 시기다. 실제와의 만남과 물리적 관계 맺기가 옅어지는 자리에서 위안으로 과거의 노스탤지어만 남는 것은 아닌지, 그 틈에서 무엇을 다시 붙들어야 하는지 묻는다.

마지막으로 남는 화두는 읽기다. 박보나는 주체적인 독해가 없다면 보이는 것 너머의 의미와 차이를 발견하고 다른 질서를 상상할 가능성도 잃게 된다고 적으며, 예술과 독서가 사라진 감각을 다시 불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는지 끝까지 묻는다.

△ '어느 날 장미가 사라졌다'/ 박보나 지음/ 200쪽

'어느 날 장미가 사라졌다'는 기술 자본주의가 지워가거나 잊도록 강요한 감각과 관계의 흔적을 동시대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업으로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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