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경, 화조도 2019-2023, Asian watercolor and dye ink on coffee filter, mounted on rice paper and wood, ∅ 25.4 cm (영은미술관 제공)
매일 아침 무심코 버리는 커피 여과지가 예술가의 손을 거쳐 아련한 추억을 부르는 한 폭의 고문서로 재탄생했다. 일상의 흔적 위에 전통 민화의 정서를 결합해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한 이색적인 전시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영은미술관은 26일까지 영은창작스튜디오 13기 입주작가인 우보경의 개인전 '회상 Reminiscence'을 연다. 우 작가는 1957년생으로, 국민대학교를 마친 뒤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뉴욕과 뉴저지에서 섬유 디자이너로 일하며 서구의 세련된 현대 미술을 경험했지만, 오히려 그 중심지에서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외로웠던 타국 생활 중 우연히 떠올린 할머니 방의 민화 병풍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은 독특한 재료의 활용이다. 작가는 커피를 내리고 남은 종이 필터를 지지체로 쓴다. 커피 물이 은은하게 배어든 여과지는 마치 수백 년의 세월을 버텨낸 빛바랜 한지 같은 예스러운 느낌을 풍긴다. 이 위에 동양화 물감과 염색 잉크를 칠해 청자와 백자의 신비로운 빛깔, 꽃과 동물의 따뜻한 색감을 채워 넣는다. 마지막으로 투명한 코팅제를 덧발라 도자기 특유의 매끄러운 표면까지 완벽하게 재현했다.
우보경_'회상 Reminiscence'展 전경사진_영은미술관 제2전시장 (영은미술관 제공)
그의 화면 속에는 고구려 벽화의 문양부터 조선 시대 풍속화와 민화의 전통적인 도상들이 자유롭게 어우러진다. 과거의 민중들이 기원과 바람을 담아 민화를 그렸다면, 우보경은 날마다 일기를 쓰듯 캔버스를 채워 나간다. 그리운 이가 생기면 바탕에 비밀스러운 편지를 적어 넣고, 변화하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기록했다. 옛 여인들이 자투리 천을 꿰매어 아름다운 조각보를 만들었듯, 작가는 일상의 파편들을 하나의 거대한 기억의 공간으로 엮어냈다.
단순히 과거를 흉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지극히 현대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로 전통의 가치를 재발견해 낸 작가의 실험 정신이 돋보이는 전시다.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붓질로 불러낸 빛바랜 온기는 관람객들에게 저마다 가슴속에 묻어둔 소중한 추억과 오래된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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