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출처: 미상Unknown autho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국 정계의 거목 몽양 여운형이 괴한의 총격을 받고 향년 61세로 서거했다. 한반도의 분단을 막고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우합작 운동에 매진하던 중 당한 비극적 최후였다.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난 여운형은 구한말 기독교 신학을 접하고 대창학원 등을 설립하며 일찍이 육영 사업과 계몽 운동에 투신했다.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했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렸다. 이는 기미년 3·1 운동의 도화선이 됐으며,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도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1919년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했을 당시, 제국주의 심장부인 제국호텔에서 당당히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한 연설을 행했다. 그의 이름을 국내외에 떨치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이후에도 그는 만주와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 세력의 단결을 위해 헌신했다.
일제 말기 국내로 돌아온 그는 1944년 비밀 지하 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해 다가올 해방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예견대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찾아오자, 행정권을 이양받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치안과 행정을 장악하여 건국 초기의 극심한 혼란을 방지하는 탁월한 정무 감각을 발휘했다.
해방 후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남북 분단이 가시화되자, 그는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이끌며 중도파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극우와 극좌의 대립 속에서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해 타협과 중용의 길을 모색했으나, 이는 양측 모두에게 표적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여운형은 뛰어난 웅변술과 대중적 카리스마, 그리고 유연한 정치를 바탕으로 해방 정국에서 가장 넓은 지지 기반을 가졌던 지도자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아우르며 통일 국가를 수립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좌절됐다. 그러나 분단을 막으려 했던 그의 평화적 족적과 건국 준비 노력은 한국 현대사에 지워지지 않을 거대한 이정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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