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더 왕조의 설계자' 토머스 크롬웰 처형 [김정한의 역사&오늘]

생활/문화

뉴스1,

2026년 7월 28일, 오전 06:00

토머스 크롬웰. (출처: After 한스 홀바인,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540년 7월 28일, 잉글랜드 튜더 왕조 최고의 실권자 토머스 크롬웰이 런던탑 타워 힐에서 참수형으로 삶을 마감했다. 평민 출신에서 국왕의 수석 장관까지 오르며 권력을 휘두르던 정치가가 정적들의 공작과 왕의 변심 속에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크롬웰은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와 수장령 발포를 주도하며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완성한 핵심 인물이다. 로마 교황청과의 단절을 이끌어내고 수도원 해체와 재산 몰수를 통해 왕권을 극대화했다. 또한 근대적 행정기구 정비와 법제화를 추진해 영국 관료제의 기초를 다지는 등 국가 시스템의 틀을 새로 짠 인물이었다.

그러나 무소불위의 권력도 단 한 번의 정치적 판단 미스로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1540년 헨리 8세의 네 번째 왕비로 클레브스의 앤을 추천한 것이 결정적 화근이었다. 초상화만 보고 결혼을 결정했던 헨리 8세는 앤의 실제 모습에 크게 실망했고, 이 정략결혼은 몇 달 만에 파경에 이르렀다.

왕의 분노를 포착한 가톨릭 귀족 세력과 정적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크롬웰을 반역죄와 이단 혐의로 몰아세워 몰락시켰고, 결국 그는 제대로 된 재판조차 받지 못한 채 사형선고를 받았다. 처형 당일에는 미숙한 집행인의 오발로 여러 차례 칼을 맞으며 잔혹한 고통 끝에 숨을 거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둔 바로 그날, 헨리 8세는 다섯 번째 아내인 캐서린 하워드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크롬웰이 사망한 후 헨리 8세는 정적들의 거짓 혐의에 속아 그를 제거한 것을 크게 후회하며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를 잃었다"고 탄식했다.

토머스 크롬웰은 목적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냉혹한 정치공작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중세 잉글랜드를 근대 국가로 전환시킨 탁월한 행정가라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다. 그의 처형은 가톨릭 보수파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으나, 그가 구축한 관료제와 행정 기틀은 튜더 왕조의 번영을 받치는 단단한 뼈대로 남았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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