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1903). 잿빛 굵은 선으로 아이 잃은 어머니의 절절한 슬픔을 전한다. 에칭으로 제작했으나 목탄으로 그은 데생 같은 분위기를 낸다. 콜비츠는 당시 일곱 살이던 아들을 안은 자신을 모델로 삼았는데, 11년 뒤 그 아들이 1차대전에서 전사하자 스스로 심한 자책에 몰고간 작품이기도 하다. 20세기 독일 대표 여성 판화가이자 화가로 활동한 콜비츠는 가난한 노동자들과 생활하며 비극적인 연작을 많이 발표했다. 특히 자신의 경험을 반영한,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세상 모든 어머니를 대변하는 반전포스터 등을 제작해 전쟁의 광기와 참혹함을 알리고자 했다. 종이에 동판화·옅은 채색, 42.5×48.6㎝(판화면). 대영박물관(영국 런던) 소장.
[이윤희 미술평론가] 1914년 8월 어느 밤 독일 베를린의 좁은 셋집.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한 소년이 부모에게 뭔가 조르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소년의 청은 “전쟁에 나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군인이 돼 조국을 위해 싸우겠다고 고집했다. 아직 뺨에 솜털이 보송하고 막내티를 벗지 못한 아이였다. 입대에는 아버지의 서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단코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의 유럽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소년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다. 전쟁이 선포되자 베를린과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의 거리에는 환호하는 군중이 쏟아져 나왔다.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전쟁이 낙엽이 지기 전에 끝나리라 믿었고 젊은이들은 늦기 전에 참전하지 못할까 봐 조바심을 냈다. 오래 이어진 평화가 가져온 권태, 산업사회의 답답한 일상, 물질에 짓눌린 시민적 삶에 대한 막연한 혐오가 전쟁이란 거대한 정화의 불길 같은 갈망으로 터져나온 것이었다. 낡은 세계를 태워 없애고 뭔가 새롭고 순수한 것을 가져다주리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이 열병 앞에서 냉정을 지킨 사람은 드물었다. 지식인도 예술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판화가이자 화가인 케테 콜비츠(1867∼1945)는 그날 밤 둘째 아들 페터 콜비츠의 고집과 맞닥뜨렸지만 자신도 그 열기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자로서 황제의 제국에 반대했어도 막상 전쟁이 터지자 난생처음 민족의 중요성을 느꼈다고 일기에 적었다. 다만 남편만은 아들의 입대를 격렬히 반대했다고 썼다.
콜비츠가 일기에 거의 희곡처럼 옮겨 적은 그 밤의 대화에서 아버지는 말한다. ‘조국은 아직 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필요했다면 벌써 불렀을 것’이라고. 아들은 낮지만 단호하게 대답한다. “조국은 아직 제 나이를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저 자신은 필요로 한다고요!” 그러곤 말없이 애원하는 눈으로 어머니를 돌아본다.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저에게 말씀하셨잖아요. 우린 준비돼 있다고 말이에요.”
그 밤 어머니 콜비츠는 아들의 편에 서 남편을 설득했다. 격론은 늦도록 이어졌고 결국 아버지는 뜻을 굽혔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무거운 마음으로 아들의 지원서에 서명했다. 그렇게 아들은 군인이 돼 곧 플랑드르 전선으로 떠났다. 이제르강을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연합군이 처음으로 정면으로 부딪친 그 가을의 격전지였다. 전선에 닿은 지 열흘 남짓 지났을까. 10월 22일에서 23일로 넘어가는 밤, 아들은 포탄 파편에 맞아 숨지고 만다. 전사자 통지가 콜비츠의 집에 도착한 것은 10월 30일이었다.
아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남은 삶은 어떠할 것인가. 그날 밤 남편을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끔찍한 자책이 밀려왔고 슬픔은 시간이 지나도 옅어지지 않았다. 그 시절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많았지만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슬픔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날부터 콜비츠의 남은 삶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빈민의사 남편의 진료소에서 만난 노동자 삶 옮겨
콜비츠는 1867년 동프로이센의 항구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콜비츠의 집안은 신념을 위해 지위를 버리는 일에 익숙했다. 할아버지는 국가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로운 종교공동체를 이끌었고, 아버지는 법률가의 자격을 얻고도 자유주의적 소신 탓에 관직을 접고 미장이가 됐다. 그런 아버지가 딸의 재능을 일찍 알아봤고 그림을 배우게 했다.
스물넷이 되던 1891년, 오랜 친구이자 의사인 칼 콜비츠와 결혼했다. 남편은 고아로 자란 사회주의자였다. 두 사람은 베를린 북부에 자리잡았고 남편은 그곳에서 노동자 의료조합의 진료소를 열었다. 환자에게 직접 돈을 받지 않는 대신 조합이 정한 박한 보수를 받는 자리여서, 그는 베를린에서 가장 가난한 구역의 사람들을 평생 돌보는 빈민의사의 삶을 살았다.
콜비츠는 남편 진료실과 환자대기실 사이의 작은 방에 화실을 마련했다. 문 하나만 열면 방직공의 아내, 미장이의 아내, 아이를 여럿 낳았지만 그 절반을 땅에 묻은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남편은 그들을 돌봤고, 아내는 그들을 그리거나 판화로 남겼다. 콜비츠가 평생 그린 얼굴들, 곧 노동으로 굵어진 손과 굶주림으로 파인 뺨, 아픈 아이를 껴안은 어머니의 모습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그 환자대기실에서 매일 관찰한 것이었다. 관찰자는 편리한 자리였으나 그 특권은 1914년 회수됐다. 아들이 생사를 달리한 후부터 콜비츠는 아픈 아이를 안은 어머니를 관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어머니 자신이 됐기 때문이다.
아들이 죽고 열흘째 되던 날, 콜비츠는 아들을 위한 기념비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그 결심에서 완성까지는 18년이 걸렸다. 18년은 아들이 이 세상에 살고 스러진 햇수와 같다. 그사이 콜비츠는 벨기에에 있는 아들의 무덤을 두 번 찾았다. 전사자를 쓰러진 땅에 묻는 당시 관례에 따라 아들은 벨기에 독일군 묘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케테 콜비츠의 ‘비통한 부모’(1932). 1차대전에서 전사한 둘째 아들 페터 콜비츠와 전우들을 위해 빚은 통곡이자 참회의 조각상이다.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는 부모의 절망을, 전쟁이 빼앗아 간 자식의 무덤 앞에 영원한 사죄로 새겼다. 아들이 숨을 거둔 1914년 제작을 시작해 18년에 걸쳐 완성했다. 석재 좌대에 얹힌 두 상은 실제 인물이 무릎을 꿇었을 때와 거의 동일한 비율이다. 벨기에 화강암, 높이 151㎝(아버지 상)·122㎝(어머니상). 벨기에 플랑드르 블라드슬로 독일군 묘지.
아들의 무덤을 두 번째로 찾은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인 1932년 7월. 이번에는 기념비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18년에 걸쳐 흙과 석고로 거듭 고쳐 만든 두 인물상을 벨기에산 석재로 옮겨 제작했고, 마침내 실물 크기의 ‘비통한 부모’(1932)가 세워졌다. 어머니 콜비츠는 예순다섯, 아버지 콜비츠는 예순아홉이었다. 두 부부를 옮겨낸 그 조각상은 아직도 벨기에 독일군 묘지 자리에 있다.
◇일곱 살 아들을 모델로 삼은 판화의 형벌
사실 콜비츠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또 다른 자책감을 늘 가지고 있었다. 오래전 제작한 판화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1903) 때문이다. 벌거벗은 어머니가 웅크린 채 두 다리 사이에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아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애통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당시 일곱 살이던 아들을 안은 자신을 모델로 삼아 거울에 비추면서 작업한 것이다. 아이를 안고 그림을 그리면서 콜비츠는 힘든 내색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아들은 그림이 예쁘게 될 것이라며 엄마를 격려했다는 것이다. 예쁜 그림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 아들을 잃은 뒤 콜비츠는 어떤 마음으로 이 작품을 다시 봤을까. 겨우 일곱 살 아이를 죽음의 자세로 안고 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린 것인가, 왜 하필 죽은 아이의 역할을 시켰던가 평생 자신을 책망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것은 예감도 부름도 아니었다. 유아사망률이 높은 노동자 구역에서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를 매일 봤던 사람에게 그런 그림은 예언이 아니라 관찰이었고 그 관찰 속에 자신과 자기 아들을 대입해 봤을 뿐이다.
케테 콜비츠와 두 아들. 1909년 독일 베를린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한다. 콜비츠(가운데)의 왼쪽에 20대 초반의 큰 아들 한스 콜비츠가, 오른쪽에 10대 중반의 둘째 아들 페테 콜비츠가 섰다.
일기를 열심히 쓰던 콜비츠는 이때 펜을 내려놓았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 폭격으로 집이 무너지면서 작품 역시 거의 다 사라졌다. 콜비츠는 반쯤 눈이 먼 채 드레스덴 근교로 옮겨가 마지막 해를 보냈고 1945년 4월 전쟁이 끝나기 며칠 전 숨을 거뒀다.
오늘도 벨기에 독일군 묘지를 찾는 사람들은 나무 사이에 놓인 부부 조각상을 본다. 콜비츠는 자신이 끝내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를 돌에 새겨 아들과 그의 전우들 무덤 앞에 영구히 세워뒀다. 광기의 시대에 예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한없이 묻게 한 것이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