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노예 해방 투쟁에 바친 윌리엄 윌버포스 (출처: Thomas Lawrence,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834년 8월 1일, 대영제국 전역에서 인권사에 있어 역사적인 변화의 종소리가 울렸다. 찰스 그레이 영국 총리가 모든 영국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폐지한다고 천명했다.
이로써 서인도 제도와 남아프리카, 캐나다 등지에 묶여 있던 8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계 노예들이 법적으로 자유의 몸을 얻었다. 이는 수 세기 동안 인간을 매매 가능한 상품으로 취급하던 대영제국의 비인도적 체제에 결정적 균열을 낸 사건이었다.
이 해방 선언은 단순한 위정자들의 시혜가 아니었다. 윌리엄 윌버포스를 위시한 시민사회의 오랜 폐지 운동과 노예 당사자들의 피어린 저항이 이뤄낸 결실이었다. 특히 1831년 자메이카에서 일어난 '바티스트 전쟁'을 비롯한 피압박자들의 연이은 봉기는 노예 노동 기반 경제의 한계를 폭로하며 폐지 논의를 가속화했다.
그러나 1834년의 해방은 완전하고 즉각적인 자유를 의미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구 노예주들에게 국가 예산의 약 40%에 달하는 2000만 파운드의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했으나, 피해 당사자인 노예들에게는 어떠한 배상도 없었다. 도리어 '견습제'를 도입해 실질적인 강제 노동을 수년간 연장함으로써 지주 계급의 기득권을 우선 보호하는 한계를 보였다.
그럼에도 이 노예 해방 선언이 지닌 역사적 의의는 결코 퇴색하지 않는다. 이 사건은 인간 소유라는 야만적 관행을 법적으로 종식하고 보편적 인권 가치를 현대 제도에 이식한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영국의 노예제 폐지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과 미국의 폐지론자들에게 강력한 영감을 제공했으며, 전 세계 반노예제 연대 운동의 핵심 촉매로 작용했다.
이날은 인간 존엄성을 향한 인류의 위대한 전진인 동시에 제국주의 자본이 빚어낸 시대적 한계를 동시에 증명한 날이었다. 그 역사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참된 자유와 사회적 정의, 그리고 불완전한 과거사 청산의 문제를 끊임없이 되묻게 만드는 이정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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