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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경찰과 노동자들이 대치하는 파업 현장과 평화로운 발레 수업을 병치해 연출한 ‘솔리다리티’(Solidarity, 연대) 장면.(사진=신시컴퍼니)
‘최애 뮤지컬’을 묻는 질문을 받을 때면 항상 꼽는 작품들이다. ‘오페라의 유령’의 압도적 음악과 화려한 무대, ‘위키드’의 편견을 뒤집는 새로운 시선과 폭발적인 넘버, 꿈·희망·도전을 이야기하는 ‘맨 오브 라 만차’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그렇다면 ‘빌리 엘리어트’의 매력은 무엇일까. 이 작품은 광부 아버지를 둔 소년 빌리가 발레리노의 꿈을 이뤄가는 과정을 그린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가는 흔한 성장 드라마같지만, 갈등을 딛고 꿈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 속에서 진한 부성애와 친구 간의 우정, 광산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투쟁이 어우러져 감동의 진폭이 매우 크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복싱 헤드기어를 착용한 빌리가 윌킨슨 부인의 발레 수업을 참관하고 있다.(사진=신시컴퍼니)
원작은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ldry) 감독의 동명 영화다. 2005년 엘튼 존(Elton John)의 음악과 함께 뮤지컬로 재탄생한 뒤 영국 웨스트엔드, 미국 브로드웨이 등 전 세계에서 20년 이상 무대에 올라 약 1200만 명이 관람한 작품이다. 올리비에상 5개 부문, 토니상 10개 부문 등 총 80여 개의 수상 기록도 갖고 있는 명실공히 현대 뮤지컬의 대표작 중 하나다. 한국에선 2010년 초연, 2017년 재연, 2021년 삼연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 시즌이었다.
(뮤지컬 제작은 엘튼 존의 아이디어였다. 2000년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에서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감동받은 엘튼 존이 뮤지컬화를 제안했고, 스스로 작곡을 맡았다. 달드리는 “엘튼 존은 ‘빌리가 곧 자신의 이야기’라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엘튼 존의 제안 후 약 5년 만인 2005년 3월 영국 런던 빅토리아 팰리스 극장에서 초연했다.)
작품의 배경은 대규모 광부 파업이 발생했던 1980년대 중반 영국이다. 여기서 당시 영국의 정치·경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 때 세계를 호령했던 영국은 1970년대 들어 강성노조로 인한 임금 상승, 생산성 저하, 과도한 복지정책 등 이른바 ‘영국병’으로 극심한 경기 침체기를 겪었고, 급기야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금융지원을 받는 처지가 된다. 1997년 11월부터 우리가 겪었던 그 외환위기를 20년 전 영국은 이미 경험한 것이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광부들이 ‘공동체를 구하자’(Save our community) 플래카드를 흔들고 있다.(사진=신시컴퍼니)
(당시 대처 전 총리에 대한 광부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작품을 보면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작품은 강인한 리더십으로 ‘철의 여인’으로 추앙받던 대처 전 총리를 악마같은 거대 인형으로 표현하는 등 끊임없이 조롱한다. 2막 시작과 함께 마을 주민들이 모두 나와 흥겹게 부르는 넘버 ‘메리 크리스마스, 매기 대처’는 “오늘은 기쁜 날, 당신의 죽을 날이 하루 더 다가왔네”, “올 크리스마스에는 산타도 민영화 한다네” 등의 노랫말로 이뤄졌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가족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 할 상황에 놓인 빌리가 분노하며 '앵그리 댄스'를 추고 있다.(사진=신시컴퍼니)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막이 오름과 동시에 석탄산업 국유화부터 광산 폐쇄까지 흑백 뉴스 영상을 틀어주며 이런 시대적 배경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영상이 끝나면 광부들이 뛰쳐 나와 ‘세이브 아워 커뮤니티’(Save our community, 공동체를 구하자) 플래카드를 흔들며 “모두 다같이 영원히 / 우린 자랑스러운 노동자”라고 합창하며 공연을 시작한다.
대열 속에 묻혀 무대에 오른 주인공 빌리는 파업에 참여 중인 아버지와 형, 그리고 치매증세가 있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 11세 소년이다. 빌리의 부친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빌리를 하루 교습비 50센트의 권투수업에 보낸다. 어느 날 빌리는 권투 수업 이후 열리는 발레 클래스를 우연히 보고선 푹 빠지고, 그런 빌리에게서 발레 선생인 윌킨슨 부인은 남다른 재능을 발견한다.
이날 이후 윌킨슨 부인의 목표는 빌리를 로열 발레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이다. 보수적인 문화의 탄광촌에서 발레는 여자들이나 추는 춤이자, 부르주아 계급의 전유물처럼 여기며 터부시됐다. 하지만 빌리에게 로열 발레학교 입학은 춤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실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였다.
발레를 향한 빌리의 열정과 진정성을 본 사람들은 조금씩 변화한다. “남자가 무슨 발레냐!”며 반대하던 빌리의 아버지는 입학 시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동료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파업 대열에서 이탈하고, 고집스럽게 ‘공동체’를 부르짖던 형도 빌리를 응원한다. 마을 주민들은 파업보다 아이들의 성장이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가족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 할 상황에 놓인 빌리가 분노하며 '앵그리 댄스'를 추고 있다.(사진=신시컴퍼니)
“빌리, 춤을 출 때 어떤 기분인지 얘기해줄 수 있니?”
“설명할 수 없어요/ 말로는 표현 못 해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죠/ 춤을 출 땐 그냥 잊어버려요. 내가 누군지/ 그러면서도 나 자신이 완전해지는 느낌이죠.”
춤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담은 노랫말과 함께 춤출 때 느끼는 짜릿함을 전기에 감전된 것에 비교해 화려한 몸짓으로 표현한 ‘일렉트릭시티’(Electricity, 전기)는 이 작품의 최고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로열 발레학교 오디션에 참가한 빌리가 아버지 앞에서 '일렉트리시티'를 노래하며 춤추고 있다.(사진=신시컴퍼니)
어두운 막장으로 내려가는 승강기에 몸을 싣는 광부들의 모습은 먹먹한 울림을 남기지만, 씩씩한 목소리로 “자랑스럽게 나아가리/ 강인하게 나아가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 전진하리라”라고 노래 부르는 그들의 모습은 전혀 애처롭지 않다. 오히려 멀찌감치 떨어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빌리를 보면서 그의 성장에 기대감을 품게 만든다. 이 장면에서 승강기를 탄 광부들의 헤드랜턴이 빌리를 비추는 연출도 압권이다.
뮤지컬은 빌리가 단짝 친구인 마이클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런던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 같은 결말은 빌리가 로얄 발레단의 발레리노로 성장해 메튜 본의 ‘백조의 호수’에서 남성 백조로 힘차게 도약하면서 끝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는 완전히 다르다. 영화가 빌리의 ‘화려한 비상’에 주목했다면, 뮤지컬은 그를 있게 해준 ‘사람들’을 끝까지 비춰주며 영화와는 다른 질감의 감동을 선사한다.
김일송 공연칼럼니스트는 “단순한 각색의 수준을 넘어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한 것”이라며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은 단순한 작별 인사가 아니라, 빌리의 성장을 뒷받침한 연대와 희생에 바치는 따뜻한 헌사”리고 설명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소년 빌리와 성인 빌리가 2인무 ‘드림 발레’ 춤을 추고 있다.(사진=신시컴퍼니)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 등장하는 탄광촌이라는 배경과 장기 파업 등의 소재가 한국에선 무척 낯설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내재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애환, 어린 소년의 꿈과 희망은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특히 탄탄한 드라마 속에서 발현되는 긴박하고 역동적인 발레 안무가 175분 러닝타임 내내 시선을 붙든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갖는 독보적 매력은 압도적인 연출의 힘에서 비롯된다. 경찰과 노동자들이 대치하는 파업 현장과 평화로운 발레 수업을 병치한 ‘솔리다리티’(Solidarity, 연대)가 대표적이다. 정부와 노동자, 남성성과 여성성, 꿈과 현실이 끊임없이 부딪히는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아이들, 군인, 광산노동자 등 무대 위 모든 배우들이 “모두 다 같이”, “영원히”를 부르짖으며 연대와 결속을 염원하는 모습이 강렬하게 각인된다.
가족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 할 상황에 놓인 빌리가 분노하며 탭댄스를 추는 ‘앵그리 댄스’(Angry Dance)도 빼놓을 수 없다. 절망과 분노가 폭발하는 이 장면은 단순한 사춘기의 반항을 넘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이외에 △‘백조의 호수’ 음악에 맞춰 소년 빌리가 성인 빌리와 함께 2인무를 추며 앞으로 빌리가 앞으로 어떤 무용수로 성장할지 보여주는 ‘드림 발레’(Dream Ballet) △춤이 주는 짜릿한 느낌을 전기에 빗대 발레와 현대 무용으로 표현한 ‘일렉트릭시티’(Electricity, 전기) △빌리의 꿈과 광부들의 좌절을 대비시키며 한 세대의 쇠락과 다음 세대의 새로운 출발을 표현한 ‘원스 위 워 킹스’(Once We Were Kings, 한때 우리는 왕들이었지) 등 뇌리에 박히는 명장면들이 곳곳에 수두룩하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파업에 실패한 광부들은 어두운 막장으로 내려가고, 빌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사진=신서컴퍼니)
이 작품에서 주인공 빌리는 전체 공연의 90% 이상 무대에 올라 노래는 물론, 발레, 탭댄스, 아크로바틱 등 다양한 장르의 춤으로 에너지를 쏟아낸다. 빌리의 역량이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여겨지는 이유다. 또한 빌리는 키 150㎝이하, 변성기 전 등 소년의 이미지에 맞는 까다로운 조건도 충족해야 한다.
이들은 ‘빌리 스쿨’에서 매주 6일, 6시간씩 혹독한 훈련 속에서 80쪽 분량의 대본을 외우고 샤프롱(아역 관리 전문가)의 세심한 관리를 받으며 실력을 담금질 한다. 무려 1년 반에 걸친 사투 끝에 이번 시즌 ‘4대 빌리’로 무대에 선 아역 배우는 김승주(13), 박지후(12), 김우진(11), 조윤우(10)였다.
'4대 빌리'들. 왼쪽부터 박지후, 조윤우, 김우진, 김승주(사진=신시컴퍼니)
가슴 따뜻한 이야기에 아름다운 음악과 환상적인 춤을 덧씌워 완벽하게 무대에 스며든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많은 이들이 ‘인생영화’로 꼽는 동명의 원작 영화를 뛰어넘는 감동을 선사한다. 150cm가 안 되는 작은 키에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앳된 아이가 펼쳐내는 열정의 무대는 언제 봐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사랑, 배려, 이해 등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극 전반에 지문처럼 묻어있어 보는내내 훈훈하고 뭉클하다. 연출, 안무, 음악, 서사가 완벽하게 어우러진, 그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뮤지컬’이다.
지난 4월부터 석 달여간 서울 블루스퀘어 우리은행홀 무대에 올랐던 ‘빌리 엘리어트’의 네 번째 여정은 마무리됐지만, ‘기적의 소년’ 빌리가 건넨 감동의 잔향은 여전히 기억 속에 깊이 배어있다.
(여담이지만, 2021년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삼연 공연을 앞두고 2017년 무대에서 2대 빌리로 나섰던 (김)현준이, (성)지환이, (심)현서, (천)우진이와 인터뷰를 했다. 당시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입국하지 못했던 ‘또 한 명의 빌리’ 에릭 테일러는 화상 인터뷰로 근황을 전했다. 당시 4년 만에 다시 만난 아이들은 30㎝ 이상 훌쩍 컸고 얼굴에는 군데군데 여드름도 생겨 청소년 태가 났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지난 6월 역대 빌리들이 함께 한 ‘홈커밍데이’에서 다시 만난 아이들은 이제 제법 어른스럽다. 이번 시즌 무대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던 4명의 ‘4대 빌리들’. 이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나갈 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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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4명의 빌리..“우리 정말 많이 컸죠?(이데일리 2021년 3월 16일자)
▲‘감동 빌리’ 에릭 테일러 ”코로나 진정되면 한국부터 갈래요“(이데일리 2021년 3월 23일자)
4대 빌리들. 위부터 김승주, 박지후, 김우진, 조윤우(사진=신시컴퍼니)
영화 및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을 연출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사진= 신시컴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