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풀이도 내 방식대로"… 힙하게 풀어낸 전통 굿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September 08일, AM 05:01

[이데일리 손의연 기자] 하얀 고깔을 쓴 기무간이 걸음을 떼자 이목이 집중됐다. 살풀이를 연상케 하는 동작이 세련된 춤사위에 녹아났다. 독무를 이어가던 기무간이 겹겹이 얇게 겹쳐진 흰 옷을 벗어 손에 쥐고 허공에 흩날리듯 쳐냈다. 기무간의 춤은 굿의 호흡과 정서를 구현한 판소리와 어우러지며 깊은 몰입감을 이끌어냈고, 이윽고 평온을 그려냈다.

서울시무용단 신작 '무감서기'에서 '백의 눈물' 독무를 맡은 기무간. (사진=세종문화회관)
서울시무용단 신작 '무감서기'에서 '백의 눈물' 독무를 맡은 기무간. (사진=세종문화회관)
최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무용단 연습실에서 ‘무감서기’(Gut: Whispering Steps) 시연이 끝난 후 만난 기무간은 “‘살풀이’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동작, 호흡을 움직임에 접목시켜 슬쩍 내비치면서 움직임을 좀더 재미있게 꾸미려고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살풀이 동작·호흡, 움직임에 접목”

무용계 스타인 기무간은 엠넷 ‘스테이지 파이터’에 출연하면서 대중적 인지도를 쌓았다. 그는 서울굿을 모티브로 한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무감서기’(10~13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조안무 겸 무용수로 참여한다.

‘무감서기’는 굿의 막바지에 펼쳐지는 행위로, 굿을 의뢰한 사람이 무녀의 옷을 입고 음악에 맞춰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 것을 뜻한다. 이번 작품은 누군가가 복을 내려주는 의식으로서의 굿이 아닌, 인간이 스스로 내면을 관찰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현대적 의례’로 재해석했다.

총 5개의 장으로 전개되며, 세부적으로는 굿거리 12마당으로 구성된다. 오방색을 상징하는 흑·황·청·적·백 등 다섯 색의 눈물을 주제로, 몸에 남은 기억과 감정이 치유와 해방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다양한 분야에서 개성 있는 작업을 선보인 창작진이 참여했다. 작곡가 이하느리가 첫 무용 공연 음악에 도전했으며, 영화계에서 주로 활동하는 장철수가 미디어 아트를 맡았다. 판소리 이수자 김율희도 공연 무대에 오른다.

기무간은 제1장 ‘흑의 눈물’과 제2장에 들어가는 ‘청의 눈물’ 안무를 맡았다. ‘흑의 눈물’은 괴로움을, ‘청의 눈물’은 희망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그는 “조안무로 참여했기 때문에 윤혜정 단장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잘 전달되도록 돕고자 했다”면서 “특히 ‘흑의 눈물’ 경우 나쁜 기억과 아픔, 고통, 슬픔이 몸을 뒤덮는 상태에 집중해서 작품이 품어야 하는 메시지를 깊게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제4장 ‘백의 눈물’에선 독무로 출연한다. ‘백의 눈물’은 희로애락을 모두 품고도 흔들리지 않는 초월의 존재를 형상화했다. 기무간은 “‘살풀이’ 독무 장면에서 고개를 툭툭 움직이는 동작을 넣었는데, 무당들이 뭔가 떠올랐을 때 하는 행동들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라며 “판소리 라이브가 함께하기 때문에 소리랑 1대1 듀엣이라 생각하고, 노랫말이 가지고 있는 것을 표현에 더하는 식으로 움직인다”고 부연했다.

서울시무용단 신작 '무감서기'에서 '백의 눈물' 독무를 맡은 기무간. (사진=세종문화회관)
서울시무용단 신작 '무감서기'에서 '백의 눈물' 독무를 맡은 기무간. (사진=세종문화회관)
◇“틀 갇히기보단 더 많은 걸 하고 싶어”

기무간은 늘 자신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가 중요시하는 건 경계 없는 움직임이다. 기무간은 “그냥 움직이고 싶은데 자꾸 틀에 갇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며 “다른 걸 시도하면 ‘그게 무슨 한국 춤이냐’는 질문을 받는데, 그 때마다 설명해야 하는 게 귀찮아졌다” 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한국 무용을 할 땐 하고, 다른 것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컨템퍼러리에 가까워지려 한다거나 한국무용에서 멀어지려 한다기보다,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제일 맞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기무간은 11월에 자신의 색깔을 담은 신작 두 편을 선보인다. 그간 자신이 명상하고 썼던 글들을 기반으로 구상했다. 11월 5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선보이는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다’는 경직된 인간들이 타인의 온기를 통해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는 “혼자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사람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았다”고 소개했다.

같은 달 20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는 제47회 서울무용제 경연대상 출품작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를 올린다. 기무간은 “이 작품에서 사랑은 연인 간의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라, 나를 흔들던 것들을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안고 가야 할 것으로 받아들인 상태를 뜻한다”며 “그런 상태가 됐을 때 비로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이런 제목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무용단 신작 '무감서기'에서 '백의 눈물' 독무를 맡은 기무간. (사진=꼬레오)
서울시무용단 신작 '무감서기'에서 '백의 눈물' 독무를 맡은 기무간. (사진=꼬레오)
기무간이 서울시무용단 신작 '무감서기' 중 '백의 눈물' 일부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사진=손의연 기자)
기무간이 서울시무용단 신작 '무감서기' 중 '백의 눈물' 일부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사진=손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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