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제 셰프
나에게 초등학교를 넘어 중학교 시절은 맛의 영토가 확장되는 시기였다. 어느 날인가부터 맵다는 어른들의 경고에도 해물탕의 칼칼한 맛을 알게 됐다. 특히 와사비 간장에 찍어 먹던 매운 해물찜은 충격적인 감동을 줬다. 살짝 익힌 미나리, 콩나물의 식감도 그렇고, 오래 끓여도 부드러움을 유지하는 아귀찜의 촉촉한 육질도 다른 생선과 비교할 수 있게 됐다.
사춘기 시절에 미각도 함께 길러진다
매운 것을 못 먹던 시절을 벗어나니 어른들의 음식을 따라다니면서 즐기기 시작했다. 산낙지를 먹어보면서 입안을 돌아다니는 음식을 내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서 맛본다. 먹이를 산 채로 먹는 사자나 다를 바가 뭐 있나.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코를 알싸하게 만든 고통은 묘한 쾌감으로 변했다. 초장에 와사비를 듬뿍 섞어 먹으면 즐거움과 고통은 아주 작은 경계가 있지 않나 싶다. 마치 신병훈련소의 화생방 훈련처럼 눈물과 콧물이 흐르고 나니 몸과 마음이 정화된 것 같다 할까.
젊은 시절 빠졌던 알싸한 와사비의 매력
내 요리 경험도 와사비와 함께 시작했다. 당시에는 가루 와사비가 대부분이었다. 와사비는 찬물에 개어야 매운맛이 났다. 요즘에 나오는 생와사비 같은 것은 나오지도 않았다. 가루와사비는 밝은 연녹색을 띠고 있고, 눈물이 나고, 코를 뻥 뚫리게 할 만큼 휘산성 매운맛이 있었다.
내가 처음 일을 배웠던 곳은 미국계 일본인 셰프가 동서양의 맛을 함께 녹여내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매운 와사비를 사워 크림에 적당히 섞어 감자로 만든 에피타이저에 곁들였다. 그릴에 구운 닭구이에는 다진 표고버섯과 오렌지 주스에 와사비를 넣어 맛을 내기도 했다.
가루 와사비를 개면서 요리 시작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식품관에서 모델들이 직접 갈아서 먹는 시즈오카 와사비를 선보이고 있다. (뉴스1DB) © 뉴스1 구윤성 기자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나서야 나는 생와사비를 갈아서 쓰기 시작했다. 뉴욕의 파인다이닝 식당에서는 전 세계 어떤 식재료든 최상급으로 쓸 수 있었다. 굵직한 필기구처럼 상어 가죽으로 만든 도구에 문지르면 찔끔찔끔 녹색 덩어리가 쌓인다. 그걸 참치 타타르에 넣어 잘 버무려주면 참치의 기름진 맛을 산뜻하게 만들어 준다. 과하지 않은 이 맛은 내가 지금까지 먹어온 와사비와는 완전히 달랐다.
최상급 참치에 생와사비를 넣고 레몬제스트,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로 맛을 낸 참치타르타르는 조화로운 맛을 낸다. 잘 만든 음악가의 화음처럼 생와사비는 절제하는 향을 내준다. 이때부터 와사비는 폭주하던 맛의 대명사에서 높은 경지의 향으로 바뀌었다.
생와사비의 풍부한 향에 놀라
맛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당시 우리가 쓰던 생와사비는 주방의 유일한 자물쇠 보관함에 들어가 있었다. 필요한 만큼 쓰고 나면 마르지 않게 감싸고 나서 보관함에 넣는다. 열쇠가 있는 보관함에 들어가는 재료는 계절마다 나오는 트뤼프와 와사비가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귀한 줄 모르고 썼던 식재료였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생와사비를 갈아쓰는 일식당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 것 같다.
고가의 생와사비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
저렴한 와사비에는 서양고추냉이가 들어간다. 재배가 쉽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밭에서 키울 수 있어서 공급량이 많다고 한다. 반면 생와사비는 재배 조건이 까다롭다. 온도, 수질, 토양에 따라 맞춰야 할 경우의 수도 많다.
와사비를 구매한다면 서양고추냉이와 일본고추냉이의 함량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구매 시 가격보다 성분 분석표를 자세히 봐야 하는 품목이다.
와사비 함량을 보면서 조금씩 입맛에 변화를 주는 것도 방법이다. 어린 시절부터 먹었던 가루와사비도 좋지만, 경험으로 치면 생와사비의 풍부한 향은 느껴 볼 만한 경험이다. 사춘기 시절에 와사비를 통해 어른의 맛을 배워가듯 지금은 맛의 진실에도 눈을 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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