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호 한길사 대표.(사진=김태형 기자)
김 대표는 군사정부 시절이던 1975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이듬해인 1976년 한길사를 설립, 반세기 동안 한국 출판계의 대표 인문 출판사로 키워냈다. 그간 한길사가 만든 책은 3500여 권으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인간의 조건’ 그리고 ‘오늘의 사상신서’ 시리즈 등이 있다.
최근 출판 환경은 분명 녹록지 않다. 독서 인구가 줄고, 미디어가 다양해지면서 책의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종합 독서율(최근 1년 내 종이책, 전자책 등을 읽은 비율)은 38.5%로 역대 최저치를 찍었다.
하지만 반세기 동안 책을 만들어 온 김 대표는 “책을 만드는 일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인간에게 아름다운 정신을 공급해주는 것은 책”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책이 단순한 읽을거리라기보단 그 시대에 걸맞는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독자들에게 좋은 책을 전달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 대표와의 일문일답.
김언호 한길사 대표.(사진=김태형 기자)
△출판도 활자 매체에 의한 것이니까 근본적으로는 언론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본다. 신문·방송이 매일매일 일어나는 사실과 현상을 담아낸다면, 책은 좀 더 오랜 시간을 두고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 책은 결국 사람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함께 토론하고 성찰하는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 출판사를 세웠을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가치가 있다면?
△출판사를 시작하자마자 ‘오늘의 사상 신서’를 내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실천해야 할 것인가, 우리 사회와 민족공동체를 발전시키는 데 어떤 정신과 이론이 필요한가를 담아내는 책들이었다. 한마디로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책. 1990년대 후반까지 약 190~200권 정도 냈다.
-1970~80년대를 두고 ‘위대한 책의 시대’라고 얘기한 이유는
△그때는 책을 썼다고 잡아가고, 만들었다고 잡아가고, 읽었다고 잡아갔다. 정부가 자꾸 판매금지를 시켰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표적인 것이 1985년 ‘출판인 17인 선언’이다. 골자는 출판인의 양심에 따라서 저술가의 양심에 따라서 책을 만들고, 독자들은 그것을 선택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 정치권력이 이것을 읽어라, 저것은 읽지 말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도 읽고 저것도 읽고, 다양한 책을 다 같이 읽어야 바람직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역량은 책이다. 1980년대에는 언론도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책이 시대의 깊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뤘다. 우리는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책을 만들면서 권위주의에 싸웠다. 그랬더니 정말 시대가 바뀌더라. 그래서 1980년대를 ‘위대한 책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전자책보단 종이책을 선호한다고 들었다.
△종이책은 밑줄도 긋고 자기 느낌도 적을 수 있다.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볼 수도 있지 않나. 인간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사유를 심화시키는 데 종이책이 더 깊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종이책은 내 몸과 하나가 되는 어떤 독서 방법이라고 할까, 일체화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반면 전자책은 기계적인 독서에 가깝다. 물론 한길사도 전자책과 오디오북을 낸다. 그것도 어쨌든 하나의 문명 현상이니까. 다만 종이를 넘기는 몸짓이라던가 페이지를 넘길 때의 소리 같은, 깊은 교감과 인식은 역시 종이책으로 가능하다고 본다.
-전자책이나 디지털 매체의 장점도 인정하는 건가.
△물론이다. 기능적으로 텍스트를 읽는다든지, 공식 등 기계적인 내용을 보는 데는 전자책이 더 편리할 수 있다. 전자책을 처음부터 읽어온 사람들도 있는 만큼 그것을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읽는다는 것이 단순히 기능적으로 읽는 게 아니지 않나. 정신적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고, 그런 점에서 종이책이 더 깊숙한 정신의 힘을 갖게 해준다는 생각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여전히 자유로운 지성은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과도한 물질문명이 인간을 엄습하고 있다. AI도 그렇다. 지금 우리는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 가지고 인간답게 살 수는 없다. 21세기 폭력적인 물질문명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중요한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인간은 과도하게 돈과 AI에 지배당하고 있다. 돈만 벌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나. 물론 돈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것을 정당하고 아름답게 사용해야 한다. 인간의 생각하는 힘, 인문 정신이 중요하다. AI가 모든 것을 다 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지금 AI 시대에 더욱 중요한 것은 인문정신과 인문이론이다. 이것을 체득하는 데는 역시 좋은 책, 좋은 책을 읽는 행위가 중요하다. 출판과 독서는 오히려 지금 새롭게 의미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고 있다.
-디지털 문명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도 느껴진다
△지하철을 타면 100명이 전부 전화기만 들고 있다. 기괴한 풍경이다.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어느 쪽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디지털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 본래는 인간에게 편리한 것으로 전화기를 만들었을 텐데 모든 게 스마트폰 위주로 돌아가니 인간의 기억력도 떨어지고 있다.
-책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데, 책이란 무엇으로 다가오는가.
△책은 원천적으로 미술과 가까운 장르다. 표지를 만들고 문자를 쓰고 펼쳐보면 그 자체가 미술 아닌가. 특히 한글이라는 문자가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 한국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이 한글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또 다른 미술이고 예술이다. 책을 계속 관찰해보면 책만큼 아름다운 존재는 없다. 그래서 카메라도 직접 들고 다니면서 책을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잘 만들어 독자들의 가슴속에 넣어줄 것인가 생각한다. 진정한 출판인은 예술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판사를 이끌어 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최근에 고민이 많기는 하다. 오늘날 세대가 책을 읽지 않고 모든 것이 AI로 되는 줄 알까봐 우려스럽다. 미디어가 많아졌으니 책을 덜 읽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독서는 역시 종이책을 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50년 전으로 돌아가도 다시 출판사를 세울 건가.
△책을 만들면 만들수록 출판이란 참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들에게 아름다운 정신을 공급해주는 것이 책 아닌가. 다시 한다고 해도 책을 더 근사하게, 더 잘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 시대의 출판문화는 그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독자와 저자와 출판사가 함께 만드는 것이다. 저자와 출판사와 독자가 수평적으로 연대하면서 만들어가는 것. 저자들에게 언제나 감사하지만, 우리 책을 읽어준 독자들에게도 감사하다.
-회고록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언제쯤 볼 수 있나.
△800~900쪽 정도 되는 일기를 현재 다섯 권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사진 작업까지 해야 해서 시간이 좀 필요하다. 책 사진과 저자 사진, 중요한 행사 사진 등을 넣으려고 한다. 아마 올해 연말에는 완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반세기동안 한길만 걸으셨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에 남고 싶은지.
△책을 사랑하고 책과 함께 생애를 보낸 사람.
김언호 대표(왼쪽)와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사진=한길사)
△1945년 밀양 출생 △중앙대 신문학 학사 △서울대 대학원 언론정보학 석사 △전 동아일보 기자 △전 한국출판인회의 회장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전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 △전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현 한길사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