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송편이라고?”…강원은 감자, 남도는 모시였다 [강경록의 미식로드]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September 24일, AM 10:06

[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추석 상에 오른 매끈한 반달 송편 한 접시를 보며 ‘송편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고 단정 짓는다면, 그것은 한반도가 품은 다채로운 식생 지리학을 미처 읽어내지 못한 탓이다. 전국이 똑같이 ‘송편’이라 부르지만 속사정을 톺아보면 팔도 사투리만큼이나 개성이 뚜렷하다. 한 알씩 반으로 갈라보는 배고픔을 달래는 행위를 넘어 송편허기를 채우는 행위를 넘어 그 떡의 역사를 혀끝으로 고스란히 음미하는 일이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이웃에 전할 송편을 포장하고 있는 모습(사진=이데일리 DB)
추석 명절을 앞두고 이웃에 전할 송편을 포장하고 있는 모습(사진=이데일리 DB)
본래 송편은 추석 전용 떡이 아니었다. 고려 문헌 속 기록을 차치하더라도 조선 후기 유득공의 ‘동국세시기’에는 음력 2월 초하루 머슴날에 일꾼들의 노고를 치하하려 크게 빚어 나누었다는 기록이 선명하다. 그러던 송편이 햅쌀과 햇곡식이 터져 나오는 가을과 극적으로 만나면서 비로소 추석 차례상의 당당한 ‘단독 주연’으로 입지를 굳혔다.

감자송편은 감자녹말 반죽에 팥이나 강낭콩으로 소를 넣고 송편처럼 빚어 쪄낸다. 강릉에서는 이 떡을 빚을 때 손자국으로 장식하기도 한다.(사진=문체부)
감자송편은 감자녹말 반죽에 팥이나 강낭콩으로 소를 넣고 송편처럼 빚어 쪄낸다. 강릉에서는 이 떡을 빚을 때 손자국으로 장식하기도 한다.(사진=문체부)
강원도 산간에 들어서면 쌀가루 대신 척박한 땅이 내어준 감자 녹말이 반죽 판을 장악한다. “우리 동네엔 감자가 효자라오”라며 떡이 먼저 말을 건네는 듯한 감자송편은 쌀가루 송편이 살짝 자리를 내어줄 만큼 투명하고 쫄깃한 질감을 뽐낸다. 명절이라고 갑자기 서울식으로 갈아탈 이유가 없던 산골 사람들의 지혜롭고 유쾌한 생존 전략이었다.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모시 잎을 넣고 송편을 만드는 지역이 많다. 모시잎송편은 모시잎을 삶아 멥쌀과 섞어 만든 반죽에 콩, 팥, 밤, 대추, 깨 등을 소로 넣어 만든다.(사진=문체부)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모시 잎을 넣고 송편을 만드는 지역이 많다. 모시잎송편은 모시잎을 삶아 멥쌀과 섞어 만든 반죽에 콩, 팥, 밤, 대추, 깨 등을 소로 넣어 만든다.(사진=문체부)
남도로 눈을 돌리면 색감의 반전이 펼쳐진다. 전남 영광과 고흥의 송편은 짙은 초록빛 모싯잎을 머금어 ‘송편이 이렇게 진지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정갈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지리적표시 제104호’라는 어엿한 훈장을 단 영광모싯잎송편의 속을 채우는 진짜 주인공은 고소한 ‘동부콩’이다. 송편 하나를 만드느라 쌀농사와 모시밭, 콩밭이 한꺼번에 바쁘게 움직이니, 명절의 절식(節食)이 어느덧 당당한 지역 효자 산업으로 진화한 셈이다.

호박송편은 가을에 나는 호박을 썰어 말렸다가 가루로 만들어 쌀가루와 섞은 반죽으로 만든다.(사진=문체부)
호박송편은 가을에 나는 호박을 썰어 말렸다가 가루로 만들어 쌀가루와 섞은 반죽으로 만든다.(사진=문체부)
충청도 들녘에선 가을볕에 노랗게 익은 늙은 호박이 멥쌀가루 사이로 슬쩍 끼어든다. 대단한 레시피 책보다 그 계절에 밭에서 제일 흔하고 맛있게 익은 식재료를 기꺼이 품어안던 넉넉함이자, 추석 상차림이 곧 ‘이 동네 올해 농사 성적표’였던 셈이다. 제주로 향하면 반달에 대한 고집마저 시원하게 내려놓는다. 완두콩 소를 넣고 동글납작하게 빚어낸다. 북녘 평안도 해안가에선 만선을 기원하며 모시조개 모양으로 다듬었다니, 삶의 염원이 형태를 결정지은 미학적 증거다.

“송편 예쁘게 빚으면 예쁜 딸 낳는다”는 세간의 속설은 또 어떤가. 과학적 근거는 거의 없지만 긴 밤 부엌에 둘러앉아 고단한 노동의 피로를 잊으려 터뜨리던 소박하고 정겨운 추임새였다. 떡 하나에 풍년과 자식 복, 가족의 안녕까지 떠맡긴 것 같지만 명절 음식이란 원래 그런 기원의 무게를 함께 나누어 씹어 삼키는 맛이다.

서울 동대문구 한 전통시장 매대에 올라온 송편(사진=이데일리 DB)
서울 동대문구 한 전통시장 매대에 올라온 송편(사진=이데일리 DB)
물류의 발달로 이제는 서울 아파트 안방에서도 클릭 몇 번이면 강원도 감자송편과 영광 모싯잎송편이 당일 배송되는 세상이다. 고향 가는 길은 막혀도 송편은 전국을 자유롭게 출장 다닌다. 유통망이 확장될수록 역설적이게도 각 송편의 ‘출신 성분’은 더욱 선명해져, 감자는 강원의 밭을, 모시는 영광의 들판을, 호박은 충청의 가을을 고스란히 소환한다.

올가을 추석상에 송편이 오른다면 한 번쯤 유심히 들여다보자. 희고 초록이고 노랗고, 반달이고 둥글고, 안에는 콩과 깨와 밤이 알차게 들어차 있다.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하나같이 제 고향의 숨결과 계절을 알뜰히 품고 있다. 사람만 명절에 고향을 찾는 것이 아니다. 한입 베어 물면 송편도 기꺼이 제 고향의 풍경과 시간 속으로 우리를 다정하게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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