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판 레인의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 스물여섯의 청년 렘브란트를 단숨에 최고의 초상화가이자 스타작가로 만들어준 출세작이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에 유행하던 집단초상화의 전형을 뒤집은 혁신으로 주목받았다. 모든 인물을 일렬로 세우고 정면을 바라보게 했던 관례를 깨고, ‘해부시연’ 서사 위에 엇갈리는 시선, 긴장감 넘치는 표정 등을 채워 마치 연극무대의 한 장면처럼 연출했다. 해부대에 오른 시신은 이 강의가 열리기 불과 몇 시간 전 암스테르담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범죄자다. 당시 암스테르담 외과의사 길드는 1년에 단 한 번 공개 해부학 강의를 열 수 있었고 반드시 사형이 집행된 범죄자의 시신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법적 제약이 있었다. 캔버스에 유채, 169.5×216.5㎝. 마우리츠하위스미술관(네덜란드 헤이그) 소장.
[이윤희 미술평론가] 1632년 1월 31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광장에 설치된 교수대에서 한 남자가 죽음을 맞았다. 외투를 훔치려다 사람을 죽게 한 강도였다. 광장에 모인 이들이 지켜보는 공개처형. 여기서 합리적 추측을 해봄직하다. 반년 전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1606∼1669)이 저 군중 어디쯤에 서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렘브란트가 스물여섯 살에 그린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는 이 죽음에서 시작한다. 그날 처형당한 사람의 몸이 산 사람들의 지식을 위해 사용됐다.
그림에서 툴프 박사는 겸자로 주검의 왼팔 근육을 들어 올리고, 다른 손은 손가락을 굽혀 그 움직임을 되짚고 있다. 그 주위에는 검은 옷에 흰 깃을 세운 일곱 남자가 모여들었다. 이 그림은 실제로 당시 활동했던 의사들의 ‘집단초상화’다. 이들 각각은 렘브란트에게 자신의 초상화 값을 지불했다. 그 시절 네덜란드의 집단초상화는 도시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시민군, 직업조합, 여러 기관의 운영자가 한 화면에 모여 지위와 결속을 드러냈다. 궁정의 왕과 귀족이 차지하던 자리를, 상인과 전문직 시민이 넓혀가고 있었다. 한 사람을 그리는 게 아닌 집단초상화는 화가에게는 까다로운 과제였다. 돈을 지불한 사람은 저마다 자신을 알아볼 수 있어야 했고, 동시에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야 했다. 개개인의 얼굴을 살리는 일과 집단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하는 일이 동시에 이뤄져야 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처럼…성 떼고 ‘렘브란트’로만 서명
렘브란트에게 성공은 벼락처럼 찾아왔다. 지방도시 레이던의 제분업자 아들은 암스테르담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명한 초상화가가 됐다.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공개되자마자 부유한 상인들이 줄지어 화실을 찾았고 그림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수업료를 싸들고 모여들어 화실은 늘 북적였다. 총독의 궁정에서도 주문이 내려왔다. 스물여섯 살의 그는 성을 뗀 이름 ‘렘브란트’만으로 그림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라파엘로가, 미켈란젤로가 그러했듯 이름 하나로 충분하다는 자신감이었다. 세상은 그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내주는 듯했다.
그 무렵 사랑도 찾아왔다. 1633년 6월 렘브란트는 약혼자 사스키아 판 아윌렌뷔르흐(1612∼1642)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그렸다(‘밀짚모자를 쓴 사스키아의 초상’ 1633). 이듬해 두 사람은 결혼했고, 1639년에는 대저택을 구입했다. 렘브란트는 아내를 꽃과 비단에 둘러싸인 봄의 여신 플로라로 거듭 그렸다. 그러나 그 집을 채운 것이 줄곧 행복만은 아니었으니, 부부가 낳은 네 아이 가운데 셋이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1641년에 태어난 넷째 티투스가 살아남았으나 이듬해 아내가 서른도 되기 전에 죽음을 맞았다. 결혼한 지 겨우 8년이 지났을 때였다.
렘브란트 판 레인의 ‘밀짚모자를 쓴 사스키아의 초상’(1633). 렘브란트가 훗날 아내가 된 약혼자 사스키아 판 아윌렌뷔르흐를 그린 은필 드로잉이다. 하단에 직접 적은 문구에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이 다 들어 있다. “이 그림은 내 아내가 21세가 되던 해, 우리가 약혼한 지 사흘째 되던 날(1633년 6월 8일) 그린 내 아내의 모습이다.” 하지만 결혼 8년 여만에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이는 렘브란트가 긴 내리막에 들어서게 된 시작점이 됐다. 양피지에 은필, 18.5×10.6㎝. 베를린국립미술관(독일 베를린) 소장.
사람들은 어째서 이 오해를 그토록 오래 믿어왔을까. 한 편의 걸작이 한 사람의 운명을 단번에 꺾었다는 이야기 자체가 대단히 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의 몰락은 그렇게 극적이지 않다.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10년, 20년에 걸쳐 조금씩 이뤄진다. 한 시절의 오판, 갚지 못한 빚, 떠나간 사람, 바뀐 취향이 소리 없이 이유를 쌓아 올린다. 대개의 몰락에는 그것을 설명해 줄 단 하나의 그림 같은 것은 없다.
렘브란트의 긴 내리막을 이해하려면 실패한 그림 한 점을 찾기보다 사랑했던 아내가 사라진 뒤의 생활을 봐야 한다. 함께 삶을 꾸리던 사람이 사라진 뒤 그는 남은 생활을 안정되게 만드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어린 티투스를 돌보던 보모와 재혼했지만 후에 이 관계는 소송으로 번졌고, 갈등 끝에 보모가 교정시설에 수용까지 된 데는 렘브란트의 개입이 있었다고 한다. 타인의 마음을 섬세하게 그린 화가라고 해서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방식까지 늘 섬세했던 것은 아니다. 이후 헨드리키어 스토펄스(1626∼1663)가 동반자가 됐지만 정식 혼인은 하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새 관계에서 자주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렘브란트 판 레인의 ‘야경’(1642).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이자 전통적인 집단초상화의 문법을 완전히 바꿔 놓은 대작이다. 원제는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의 민병대’. 이전까지 민병대 초상화가 인물을 가로로 나란히 세운 평면적인 구도였던 데 반해 렘브란트는 ‘대장이 출동명령을 내리는 순간’을 포착했다. 실제 배경은 밤이 아닌 낮이다. 오랜 세월이 쌓인 바니시(니스) 오염과 어두운 흙먼지 때문에 18세기 후반 무렵 밤 장면으로 오인해 ‘야경’이란 별칭이 붙었다. 1940년대에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통해 원래의 낮 장면과 밝고 어두운 극적인 대비가 다시 드러났다. 캔버스에 유채, 363×437㎝.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소장.
우리는 삶을 상승과 하강의 곡선으로 그리는 데 익숙하다. 정점이 높을수록 좋은 삶이고 그 뒤로 내려오면 실패한 삶이라 여긴다. 그 저울로 재면 렘브란트의 후반생은 온통 내리막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를 오래 멈춰 서게 하는 렘브란트의 그림들은 대부분 그 내리막의 세월에서 나왔다. 생활이 무너져 가며 그의 그림은 도리어 깊어졌다. 몰락하는 중에도 붓을 놓지 않았고 무너지는 삶을 매일 마주 보며 계속 그렸을 뿐이다. 그의 위대함은 몰락 속에서도 멈추지 않은 끈질김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깊게 팬 주름, 우수 어린 눈빛으로 헛헛한 웃음만
말년의 자화상 ‘제욱시스로 분한 자화상’(1662)에 그 한 장면이 있다. 늙은 사내가 어깨를 비스듬히 틀고 우리를 본다. 흰 모자 아래 이마가 드러나고 눈 밑에는 두툼한 살이 내려앉았다. 무엇보다 시선을 붙드는 것은 조금 벌어진 입이다. 웃음이 시작된 순간인지 지나간 웃음의 여운인지는 오래 들여다봐도 수수께끼 같을 뿐이다. 다만 제목이 하나의 실마리라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천재화가 제욱시스는 늙은 여인이 자신의 초상을 미의 여신으로 그려달라는 말에 그림을 그리다가 웃음을 참지 못해 죽었다고 전해진다. 화면의 왼편 어둠 속 희미한 옆 얼굴을 그 여인으로 읽으면 렘브란트는 웃다가 죽은 고대 화가를 연기하는 셈이다.
역설은 여기에 있다. 제욱시스의 웃음은 늙고 추한 여인을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가장 또렷하게 늙고 주름진 얼굴은 화가 자신의 것이다. 제욱시스가 타인의 허영을 꿰뚫어봤다고 해서 자신이 허영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한때 대저택과 값비싼 물건으로 삶을 채웠던 렘브란트는 현재 가난한 자신을 들여다보며 웃는다. 그러니 이 웃음은 세상을 향한 조소이면서 동시에 그 세상에서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아는 자의 웃음이다. 웃으면서도 그는 피로해 보인다.
렘브란트 판 레인의 ‘제욱시스로 분한 자화상’(1662).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의 외현을 빌려 만년의 자신을 들여다봤다. ‘묘한 헛웃음’이 백미다. 이른 나이에 정점을 찍고 이후 서서히 하강한 인생길을 씁쓸하게 자조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화려하고 자신감 넘치는 청년기부터 모든 것을 잃고 깊게 팬 주름과 우수 어린 눈빛만 남은 말년까지 유화·소묘·판화 등으로 남긴 100여 점의 ‘자화상 연작’ 중 하나다. 배경을 어둠으로 누르고, 강조할 부분에만 빛을 쏘는 극적인 대비로 왜 ‘빛과 어둠의 거장’인지 증명했다. 캔버스에 유채, 82.5×65㎝. 발라프리하르츠미술관(독일 쾰른) 소장.
자화상 속 렘브란트는 여전히 우리를 본다. 슬픔을 다 잊었다는 얼굴도 아니고 인생의 정답을 알아냈다는 얼굴도 아니다. 그러나 나이 든 화가의 얼굴에서는 빛이 배어나온다. 세속적인 성공과 실패로 단정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삶과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가 다 담겨 있다.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살아있구나’ 말하는 것만 같다.
편집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