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사하로프 (출처: RIA Novosti archive, image #25981 / Vladimir Fedorenko / CC-BY-SA 3.0, CC BY-SA 3.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
1975년 10월 9일,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소련의 핵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를 그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소련 국적자로서 평화상을 받은 것은 그가 사상 처음이었다.
사하로프는 본래 1950년대 소련의 수소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천재 물리학자였다. 젊은 나이에 레닌 훈장을 받고 과학아카데미 최연소 정회원에 오르는 등 체제가 보장한 최고 수준의 특권을 누렸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대량살상무기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후 핵실험 반대 운동에 뛰어들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사하로프는 뚜렷한 저항 행보를 걸었다. 1968년 '진보, 평화공존 및 지적 자유에 관한 고찰'이라는 에세이를 서방 언론에 발표하며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역설했다. 이어 1970년에는 모스크바 인권위원회를 결성해 양심수 구명과 소수민족 탄압 반대 운동을 이끌었고, 동서 냉전 양 진영의 군축과 인권 개선을 동시에 촉구했다.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크렘린 지도부는 즉각 분노를 터뜨렸다. 관영 언론 프라우다는 그를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이자 '서방 제국주의의 나팔수'로 규정하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소련 당국은 끝내 그의 출국을 불허했고, 그해 12월 10일 오슬로에서 열린 시상식에는 부인 옐레나 본네르가 대신 참석해 남편의 수상 수락 연설문을 대독했다.
정권의 탄압은 갈수록 거세졌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공개 비판하자 당국은 그가 보유한 모든 훈장과 명예 칭호를 박탈했고, 이듬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폐쇄 도시 고리키(현 니즈니노브고로드)로 강제 유배했다. 그러나 사하로프는 단식투쟁과 비밀 서한을 통해 침묵을 강요하는 전체주의 정권에 끝까지 맞섰다.
1986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모스크바로 복귀한 사하로프는 인민대표대회 대의원으로 선출돼 소련 헌법 개정과 민주화를 주도했다. 그는 1989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자유의 불씨는 훗날 동유럽 혁명과 소비에트 체제 붕괴의 도화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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