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활용' 표지 (문학과지성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6.10.31/뉴스1
'걷기의 활용'은 끝난 관계와 미처 정리하지 못한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을 그린다. 권희진은 첫 소설집에 일곱 작품을 묶어 기다림과 후회, 걷는 행위가 서로 만나는 순간을 포착했다.
표제작의 화자는 오래 알고 지낸 태수와의 관계가 어긋난 뒤 지나온 시간을 거듭 되짚는다. 잘못을 따져 묻고 싶지만 끝내 건네지 못한 질문은 걸음의 방향을 바꿔 놓는다. 몸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마음은 과거의 한 장면에 머무는 모순이 작품의 중요한 움직임이 된다.
'머리 기르는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함께 머리를 길렀던 다섯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떠난 뒤 남은 세 명이 동쪽 바다로 향한다. 이들은 과거의 인연을 돌아보면서도 돌고래를 기다린다.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일과 아직 곁에 있는 관계를 지속하려는 바람이 같은 풍경 안에 놓인다.
'열다섯 가지 습관'의 화자는 나타나지 않는 수연을 기다리며 성북동 일대를 걷는다. 정작 기다리는 대상의 모습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화자의 말 속에서만 떠오른다. 무한대 모양의 걸음은 도착을 향한 이동보다 끝없이 반복되는 기다림의 상태에 가깝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잘못과 용서의 문제가 두드러진다. '속으로 하는 말'에는 정훈과 승언을 떠나보낸 뒤 홀로 남은 인물이 등장한다. 자신을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용서를 받기 어렵다는 생각과 앞으로 살아갈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맞물리며 죄책감의 무게를 드러낸다.
'상관없는 계절'의 화자는 죽은 친구 한솔과 떠난 혜인, 어머니를 떠올린다. 모든 일을 잊겠다고 말하면서도 지나간 사람과의 시간을 계속 복기한다. 과거를 지우는 대신 지나간 관계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감각이 현재의 생활을 채운다.
'러브 레터'는 잠긴 문이 열리길 기다렸을 노인의 마음을 더듬는 과정과 높은 곳에 올라서야 보이는 풍경을 이어 놓는다. 가까이 있을 때는 분간하지 못한 일이 시간이 흐른 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설정이다. 기억은 단순히 지나간 일을 복원하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관점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권희진은 2024년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중편소설 '일단 믿는 마음'을 펴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데뷔 이후 2년 동안 발표하거나 써 내려간 이야기들이다. 인물들이 걷는 까닭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을 외면하지 않은 채 다음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과 마주한다.
△ 걷기의 활용/ 권희진 지음/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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