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표지 (다산글방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6.11.2/뉴스1
'걸리버 여행기'는 1726년 첫 출간 이후 300년을 맞아 소인국과 거인국을 넘어선 네 차례의 여정을 다시 펼쳐 보인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풍자소설을 완역한 기념판은 하늘에 떠 있는 라퓨타와 이성적인 말들이 사는 후이넘의 나라까지 담아 권력과 학문, 인간 본성을 향한 작품의 질문을 복원한다. 네 번의 여행은 단순히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는 사건이 아니라 시선이 바뀔 때 무엇을 정상이라고 믿는지도 달라진다는 구조로 연결된다.
거인 걸리버가 작은 사람들에게 묶이고, 다시 거인들의 손바닥 위에 오르는 장면은 작품의 일부에 불과하다. 여행자의 크기가 달라질 때마다 권력과 명예, 몸과 문명에 대한 판단도 뒤집힌다. 그러나 원작은 정치 권력을 얻는 절차와 학자들의 실험, 자신이 속한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까지 풍자 대상으로 삼는다.
첫 여정인 릴리펏에서는 작은 사람들의 정치가 중심에 놓인다. 관직을 얻으려 줄타기를 하고 달걀을 깨는 방식을 둘러싸고 다투는 모습은 사소한 차이를 거대한 권력 분쟁으로 키우는 정치의 작동 방식을 보여준다. 걸리버는 엄청난 신체적 우위를 지니지만 정치의 규칙까지 마음대로 바꾸지는 못한다.
걸리버는 작은 몸으로 생명의 위협을 겪으며 자신이 익숙하게 여겼던 유럽의 제도와 역사를 거인국의 눈으로 다시 설명한다. 같은 사회도 누가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스위프트는 몸의 크기를 뒤집는 장치를 통해 문명의 우월함에 관한 판단을 정해진 결론이 아닌 질문으로 바꾼다.
세 번째 여정은 지식과 제도로 무대를 옮긴다. 라퓨타와 여러 섬에 등장하는 학자들은 오이에서 햇빛을 뽑아내려 하고, 기계를 이용해 단어를 조합하며, 배설물에서 정치적 음모를 찾아내려 한다. 죽은 역사 인물들과 만나는 장면은 기록에 남은 명성과 실제 공로 사이의 간극을 묻는다.
마지막 후이넘의 나라에서는 인간을 닮은 야후와 이성적인 말들이 대비된다. 걸리버는 후이넘을 존경하고 야후를 혐오하지만, 바로 그 태도 역시 독자가 다시 따져볼 대상이다. 이성을 이상으로 삼는 일이 다른 존재를 배제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 문명과 도덕이 반드시 함께 발전하는지를 작품은 끝까지 질문한다.
이번 판본에는 네 번의 여행 외에 걸리버가 사촌 심프슨에게 보내는 편지와 출판자의 글, 보충 원고 '린달리노의 반란'이 실렸다. 새 흑백 삽화도 제작했다. 판본의 편집 기준과 스위프트의 생애, 작품 해설, 주요 인물·지명·개념 안내, 여행 연표를 별도 자료로 묶어 당대의 맥락을 따라갈 수 있게 했다.
작품의 300주년은 고전이 얼마나 오래 읽혔는지를 기념하는 시점이면서 축약된 이미지로 굳어진 이야기를 다시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릴리펏의 정치 풍자에서 브롭딩낵의 시선 전환, 라퓨타의 학문 비판, 후이넘의 인간관으로 나아가는 서사는 낯선 세계보다 익숙한 사회의 모순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낯선 세계를 통해 권력을 풍자하고 인간의 오만을 질문하는 네 여정의 연결을 복원하는 데 초점을 뒀다.
△ 걸리버 여행기/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ALTARI LAB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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