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힘찬 구령과 함께 파란색과 주황색 천을 몸에 두른 사람들이 등장하자 지나가던 시민들의 시선이 쏠렸다. 커다란 천으로 서로 연결된 이들은 양쪽으로 늘어서서 벽을 만들거나 둥글게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낯선 광경에 발걸음을 멈춘 시민들은 천으로 만들어진 길을 지나고 원 안으로 들어서며 자연스럽게 퍼포먼스에 동참했다. 참여자들이 건네는 환영 인사에 웃음으로 화답하거나 함께 몸을 흔드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한 시민이 참여자들이 천으로 만든 길을 지나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우연히 공연을 마주한 시민들의 반응도 다채로웠다. 대학로를 지나던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직원들은 참여자들이 연신 “환영합니다”라고 외치며 반갑게 맞이하자 몸을 흔들며 즐거워했다. 아르코예술극장 앞 벤치에 앉아 공연을 지켜보던 오채은(60) 씨도 호기심에 이끌려 천으로 만들어진 길을 걸었다. 오씨는 “벤치에 앉아서 지켜보다 무엇을 하는 건지 궁금해서 한번 지나가 봤다”면서 “‘모르는 사람과 이웃 같은 느낌으로 대화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흥미로운 경험이었다”고 웃어 보였다.
오후 4시에 시작한 퍼포먼스는 예정된 시간을 넘겨 40여 분간 이어졌다. 시민들과 함께 직접 참여한 로나 번 작가는 “우리는 매일 서로 마주치고 스쳐 지나가며 살아간다”며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시간이 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직원들이 천으로 만든 원 안에서 퍼포먼스를 즐기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이번 축제는 예술가의집과 마로니에공원, 한양도성 낙산 일대를 무대로 설치와 영상, 사운드 작품부터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퍼포먼스까지 다양한 형식의 예술을 선보인다. 개막 공연을 선보인 로나 번을 비롯해 최찬숙, 플로리안 돔부아, 황민규, 권아람, 로나 심슨 등 국내외 작가 6명이 참여한다.
행사의 중심 주제는 ‘슬픔’이다. 총괄 기획을 맡은 전민경 더 그레잇 커미션 대표가 2015년부터 삶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써온 희곡 ‘SAD BOOK’에서 출발했다. 전 대표는 이 희곡을 바탕으로 국내외 작가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덧쓰는’ 작업을 제안했다. 개인의 슬픔과 기억을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겹쳐보고, 예술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보자는 취지다.
흥미로운 점은 ‘슬픔’을 주제로 내세운 행사임에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밝고 활기차다는 것이다. 전 대표는 “슬픔과 기쁨은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다고 본다”며 “슬픔을 우울하고 답이 없는 감정으로만 바라보기보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이어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교감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위로의 행동”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행사를 일주일간 이어지는 ‘축제’ 형식으로 기획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슬픔을 무겁고 어두운 감정으로만 다루기보다 예술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기쁨과 위로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전 대표는 “관객들이 작품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기억이나 고민을 떠올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로나 번 작가가 참여자에게 천으로 만든 의상을 입혀주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축제에 참여한 관객들은 작품을 눈으로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만지고 입어보며 타인과 교감하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개막 퍼포먼스를 선보인 로나 번은 3일 예술가의집에서 ‘워터 패스’ 워크숍을 진행한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모자나 옷을 함께 착용하고 걷거나 재활용 천을 엮어 조각을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전 대표는 “여러 사람이 하나의 옷을 입으면 생각보다 서로 가까워져 어색하고 불편할 수 있다”며 “그런 경험을 놀이처럼 해보면서 서로의 거리와 관계를 느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영화관처럼 꾸며진 예술가의집 2층에서는 로나 심슨의 ‘클라우드스케이프’와 최찬숙의 ‘밋찌나’ 등 영상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클라우드스케이프’에서는 한 남성이 끊임없이 휘파람을 불고, ‘밋찌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기억을 다룬다. 전 대표는 “슬픔을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소리만으로 감정과 정서를 느낄 수 있다”며 “서로 다른 영상을 보면서 자신의 슬픈 기억을 연결해 보면 또 다른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전했다.
예술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자리도 이어진다. 전 대표와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이윤정 교수가 참여하는 대담 ‘고통과 진실: 슬픔의 인류학’(6일)에서는 타인의 아픔을 단순한 감상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서 예술로 풀어내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날은 직장인들도 퇴근 후 전시를 즐길 수 있도록 관람 시간을 오후 9시까지 연장한다.
개인의 기억을 타인과 나누는 방식도 다양하다. 최찬숙 작가는 북한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사람들과 함께 힘겨운 시절 곁에 있었던 노래를 부르고 그에 얽힌 사연을 나누는 ‘송 서클’(7일)을 진행한다. 권아람 작가는 드론이 전시장 안을 비행하는 퍼포먼스 ‘플라잉’(5일)을 통해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탐색한다.
축제의 마지막은 전시장을 벗어나 도시의 풍경을 새롭게 경험하는 시간으로 꾸며진다. 스위스 출신 작가 플로리안 돔부아의 ‘트리플 인스트루먼트(서울)’(8일)은 낙산공원 한양도성 일대에서 관객들이 직접 연을 날리며 바람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무선 헤드폰으로 듣는 퍼포먼스다. 한국의 방패연을 본뜬 연에는 희곡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문장이 적혀 있고, 연에 연결된 피아노 줄이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만들어낸다.
전 대표는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공간을 새로운 감각으로 마주하는 것도 특별한 예술적 경험이 될 것”이라며 “이번 행사를 통해 관객들이 현대미술을 어렵고 먼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에서 누구나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는 예술로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로나 번의 참여형 퍼포먼스 ‘움직이는 문턱’에서 참여자들이 파란색과 주황색 천을 두른 채 양쪽으로 늘어서 길을 만들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