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편의 시가 만든 모노폴리…타인의 슬픔을 통과하다

생활/문화

뉴스1,

2026년 November 04일, AM 10:03

'이름을 부르면 내가 죽어요' 표지 (문학과지성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6.11.4/뉴스1

'이름을 부르면 내가 죽어요'는 이름과 국적, 사회적 지위로 사람을 구분하는 세계의 폭력을 시로 들여다본다. 이소호는 보드게임 모노폴리의 규칙을 빌려 독자가 국경과 사회적 지위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겪은 고통과 죽음을 차례로 마주하도록 하는 형식을 택했다.

시집에는 죽음과 폭력에 관한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담은 시 55편이 담겼다. 장별로 나누는 대신 '룰북'을 따라 읽는 구성을 적용했다. 독자는 모노폴리 게임의 플레이어처럼 방글라데시와 인도, 한국, 우크라이나 등 서로 떨어진 지역에서 벌어진 차별과 폭력의 현장을 차례로 거친다.

'방글라데시안 무샤라트는 창문을 닦다가 자살했다'에는 일하다추락한 외국인 노동자의 죽음이 등장한다. 다른 시에는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사람, 목숨을 잃은 사람과 죽음의 위협을 피해 몰래 빵 조각을 먹는 등 가까스로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뉴스에서 쉽게 개인의 불행이나 사고로만 처리되는 사건 뒤에 국적과 노동, 권력의 차이가 놓여 있는지 묻는 목소리들이다.

이소호는 슬픔을 감상하는 대신 그 안을 지나가는 경험에 무게를 둔다. '시사 자키는 누구인가'에서는 남편의 통제 아래 살아가는 여성이 암컷을 미끼로 수비둘기를 잡는 사냥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생존 방식을 모색한다. 힘의 관계 속에서 희생자와 가해자의 위치가 바뀔 수 있다는 불안도 그 이야기 안에 남는다.

언어를 둘러싼 차별도 여러 형태로 등장한다. '나는 영수증이 없습니다'에서는 영수증이 없고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도둑 취급받는 사람을 만난다. 영수증과 자격증 같은 공인된 서류가 사람을 증명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여겨질 때 정작 스스로를 입증하기 어려운 사람의 경험은 기록에 담기지 않으면 쉽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문제가 이어진다.

시의 언어는 사투리와 영어 음역, 프로그래밍 코드까지 끌어안는다. 'My name is 김치'와 '머라카노', 코드 스위칭을 활용한 시편은 하나의 표준어로 정체성을 고정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각자의 말을 되찾으려는 시도는 남이 붙인 이름에서 벗어나 자신을 다시 부르는 과정과 맞닿는다.

2014년 '현대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소호는 제37회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이번 책은 '홈 스위트 홈'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네 번째 시집으로 문학과지성 시인선 643번이다. 해설을 쓴 선우은실은 언어가 타인이 되는 경험과 디아스포라의 감각을 연결한다.

△ 이름을 부르면 내가 죽어요/ 이소호 지음

art@news1.kr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