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들의 유랑극단' 표지 (문학과지성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6.11.4/뉴스1
'소녀들의 유랑극단'은 여성국극이 흥하고 쇠하는 격동의 시대를 세 소리꾼의 삶으로 되짚는다. 이상권은 집안 환경이 다른 소녀들이 판소리를 배우고 무대에 오르며 저마다의 예술과 관계를 선택하는 과정을 그렸다.
정월대보름 밤 조선성악연구회 기악실에 한초정, 노수월, 황보선무가 모인다. 가야금 명인 아버지와 소리꾼 어머니를 둔 초정, 부유한 집에서 자란 수월, 빚에 시달리는 집안의 선무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소리를 익혀 집안의 형편과 타고난 재능의 차이를 넘어 자신만의 목소리를 갖겠다는 열망으로 스승들을 찾아간다.
양서답과 천국수 등에게 배우며 세 소녀는 남과 구별되는 고유한 소리인 각자의 '더늠'을 만들어 간다. 더늠은 스승에게 배운 소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대신 자신만의 가락과 창법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다. 명창대회와 고향의 음악 교육, 사랑과 약혼을 거치며 무대에서 이름을 알리거나 고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세 사람의 길은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한다.
한국전쟁을 지나 여성국극이 인기를 얻자 소리꾼들의 선택은 더욱 복잡해진다. 여성 배우가 남성 배역까지 맡는 무대에서는 춤과 연기, 화려한 연출이 판소리와 결합하지만 배역 경쟁과 배신도 뒤따른다. 가수와 영화배우로 전향할지, 북쪽으로 떠날지, 국극 무대에 남을지에 따라 세 소녀의 우정과 예술적 신념도 갈라진다.
한초정은 인민군과 대치한 위기에서는 스승 천국수에게 배운 소리로 상황을 풀어가지만, 스승들이 요구한 모든 선택을 따르지는 않는다. 남성 배우가 있는 극단으로 옮기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새로운 여성국극단을 세운다. 한자 사설을 우리말로 고치고 무대 장치를 바꾸는 일에서도 전통음악을 물려받는 일과 과거의 방식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일은 다르다는 태도가 뚜렷해진다.
소설의 배경인 여성국극은 1950년대 수많은 관객을 모은 대중예술이었다. 그러나 텔레비전과 영화가 자리를 넓히면서 무대는 점차 쇠퇴했고 공연자들은 서로 다른 생계를 찾아 흩어졌다. 세 인물의 교차 시점은 무대가 전성기를 지나 사라져가는 과정과 그곳을 떠난 소리꾼들의 이후 삶까지 조명한다.
작품은 한국 여성 작가의 장편소설을 개척한 박화성의 문학을 기리는 2026년 박화성소설상 수상작이다. 이상권은 큰고모부의 장례식에서 광대의 삶을 떠올린 뒤 7~8년간 작품을 구상하고 2년 넘게 집필하며 임춘앵과 한애순, 김소희 등 실제 여성 예술가의 삶을 바탕으로 한초정이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등장인물과 시간의 흐름은 역사적 경험을 참조하되 소설적 상상력으로 다시 구성했다.
여성국극의 영광은 세 사람에게 같은 결과를 안겨주지 않는다. 어떤 이는 무대를 지키고 어떤 이는 다른 삶을 택하며, 우정도 선택 앞에서 흔들린다. 작품에 남는 것은 승리한 예술가의 전기가 아니라 차별과 전쟁, 무대의 쇠퇴 속에서 자신만의 가락을 남기고 더 나은 무대를 만들기 위해 버틴 여성들의 역사다.
△ 소녀들의 유랑극단/ 이상권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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