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 표지 (문학정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6.11.4/뉴스1
'구덩이'는 학생의 죽음 앞에서도 부모의 힘에 따라 책임이 달라지는 사립학교의 세계를 파고든다. 서경희는 쌍둥이 동생을 찾아 전학 온 소녀의 시선으로 폭력의 대물림을 추적한다.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된 학생이 앉았던 자리를 전학생 서라가 물려받는다. 열일곱 살 서라는 갓난아이 때 구덩이에 버려졌고 보육원에서 자랐으며, 열두 살에 헤어진 동생을 그리워하며 바닷가 마을 야월포에서 폭력을 견디고 살아남는 법을 익혔다. 동생을 구하려고 찾아온 명문 사립고는 서라에게 새로운 출발점보다 오래된 상처를 들춰내는 장소다.
죽은 학생을 괴롭힌 아이들의 이름은 소설 초반부터 드러나지만 학교에서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지 결정하는 과정부터 힘 있는 학부모들의 영향력이 작동한다. 가해 학생들은 직접 말을 섞거나 손을 댄 적이 없다며 책임을 부인하고, 부모들은 돈과 권력을 앞세워 자녀를 감싼다. 누가 가해했는지보다 이미 드러난 사실을 외면하는 어른들의 선택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다.
학교폭력은 얼굴을 맞대고 벌어지는 괴롭힘에 머물지 않는다. 가온과 그 무리는 피해 학생의 얼굴을 이용한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어 단체방에 퍼뜨린다. 피해자를 향한 폭력은 온라인으로 옮겨가지만,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실제로 만난 적이 없다고 내세우며 영상 유포가 남긴 피해까지 외면한다.
서라는 우연히 사망한 학생의 휴대전화를 손에 넣으면서 학교 안에서 벌어진 일에 접근한다. 작품은 범인을 뒤늦게 찾아내는 추리 구조 대신 이미 알려진 가해와 책임 회피의 과정을 보여준다. 무엇을 했는가보다 누구의 자녀인가가 처벌의 크기를 좌우한다는 왜곡된 질서가 서라의 눈앞에서 작동한다.
서사에는 전학생뿐 아니라 형사, 담임교사, 가해 학생들의 목소리가 번갈아 등장한다. 사건을 수습할 업무로 대하는 학교와 자녀를 보호하려는 부모, 권력의 편에 서는 경찰 윗선은 서로 다른 이유로 같은 질서를 떠받친다. 화자가 달라질 때마다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논리가 하나씩 이어지면서 피해자의 말보다 가해자의 배경이 앞서는 구조도 더욱 선명해진다.
제목의 구덩이는 갓 태어난 쌍둥이가 버려졌던 육봉산의 공간이면서 온라인 폭력과 학교의 침묵을 가리킨다. 오래전 유력 학생을 지키려고 다른 학생에게 누명을 씌운 교사가 여전히 교단에 서 있다는 설정은 과거의 선택이 시간이 지나도 청산되지 않고 새로운 세대의 폭력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잘못의 책임을 피하는 방법부터 배워간다.
서경희는 '김 대리가 죽었대'로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대상을 받았고 '경로이탈'에서는 어른들의 위선을 청소년의 시선으로 다뤘다. 이번 장편에서도 사건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으로 좁히지 않고 담임이 사건을 덮으려 하고 수사기관 윗선이 권력에 기우는 과정을 통해 학교와 가족, 경찰의 관계도 함께 들여다본다. 누구도 뒷배가 되어주지 않는 서라의 선택은 불평등한 책임의 기준을 다시 묻게 한다.
△ 구덩이/ 서경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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