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부엌과 국가폭력의 기억…장혜령의 42편 시

생활/문화

뉴스1,

2026년 November 05일, AM 10:03

'횟빛횟빛' 표지 (난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6.11.5/뉴스1

'횟빛횟빛'은 어머니를 돌본 경험과 여성의 삶, 국가폭력의 기억을 낯선 시적 언어로 엮는다. 장혜령은 익숙한 서정시의 형식을 벗어나 부엌과 병실, 제주의 신화, 갈 곳 잃은 새의 이미지를 42편의 시에 담았다.

시집은 네 개의 부를 앞뒤의 '0부'가 감싸는 독특한 구조다. 전작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를 발표한 지 5년 만에 선보인 이번 작품에는 지난 4년 동안 써온 미발표 시 34편이 들어 있어 바뀐 시적 방향을 보여준다. 제7회 부마항쟁문학상을 받은 '침묵의 샴쌍둥이'를 비롯해 사회적 폭력과 억압을 다룬 작품들도 실렸다.

시인의 삶에서는 서울에서 제주로 옮겨간 일과 어머니의 투병, 자신의 병이 중요한 변화로 남았다. 병원에서 어머니를 간병하며 글을 마감해야 했던 경험은 늙고 아픈 여성을 어떻게 말할지 묻게 한다. 병원과 집을 오가며 마주한 현실 앞에서 익숙한 서정의 어휘보다 돌봄과 가족, 지역과 기후위기의 문제를 급히 다뤄야 한다는 감각이 시집의 바탕이다.

'오늘 서쪽 날개'는 제주 신화 '원천강본풀이'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부모를 알지 못한 소녀가 '오늘'이라는 이름을 얻고 자기 근원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가 어머니를 돌본 기억과 겹친다. 자기 이름과 가족의 관계를 다시 살피는 신화적 장면은 시집에서 현실의 고통과 제주 신화의 서사가 만나는 지점이 된다.

부엌은 여성이 반복해서 노동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기 어려운 공간으로 나타난다. '태초에 국을 끓이는 여자가 있었으니'와 '주부', '부엌의 역사'는 식탁 뒤에서 사라지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돌아본다. 어머니가 끓이는 국과 꺼지지 않는 불의 이미지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돌봄이 이어지는 시간과 그 안에서 잊힌 여성의 희생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침묵의 샴쌍둥이'와 '체제의 눈' 등에서는 국가와 제도가 사람에게 남기는 상처를 다룬다. 4부의 '있을 리 없는 새'에는 얼음과 물이 사라진 곳에서 우는 새의 모습이 등장한다. 기후위기 속에 서식지를 잃어가는 새와 갈 곳 없는 사람들의 삶이 새의 울음과 겹치며 환경과 정치, 여성의 경험이 분리되지 않는 풍경을 만든다.

장혜령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했고 2017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와 소설, 산문을 발표하는 한편 여러 미술관에서 목소리를 중심으로 한 공연과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번 시집에는 대표작 '있을 리 없는 새'를 최민지가 영어로 번역한 'Impossible Bird'와 '장혜령의 편지'도 실었다.

앞과 뒤의 0부 사이에서 여성들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건너며 말을 이어간다. 보이지 않거나 기록에서 지워진 존재를 다시 부르려는 시도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누구에게 발언할 자리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시집은 사라진 목소리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경험을 한데 모아 누가 기억되고 누가 기록에서 지워지는지를 묻는다.

△ 횟빛횟빛/ 장혜령 지음

art@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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