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한국은행 창립 제75주년 기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한국은행)
한은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0.8%로, 내년은 1.6%로 하향 조정했다. 이는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위기를 제외하면 지난 30년간 가장 낮은 수치다. 불과 3개월 만에 연간 성장률 전망치를 0.7%포인트 낮춘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건설투자 부진과 내수 위축이 성장률을 끌어내리고 있으며, 최근 부동산 시장 과열 조짐도 감지되고 있다.
이 총재는 “한은은 이러한 상황을 매우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만큼 경기부양 정책이 시급해졌다고 보고 있다”면서 “당분간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 총재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긴밀한 공조 필요성도 강조했다. 다만 어느 정도의 경기부양이 적절한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낮은 성장률을 단순히 경기순환의 관점뿐만 아니라 구조적 시각에서도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봤다.
이 총재는 “현 상황에서 경기회복을 위한 부양책이 시급한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성장잠재력의 지속적인 하락을 막고 경기변동에 강건한 경제구조를 구축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면서 “급하다고 경기부양 정책에만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사후적으로 더 큰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의 금리 정책은 인하기조를 유지하되 구체적인 인하 폭과 시점은 향후 거시경제와 금융지표의 흐름을 면밀히 살펴보며 신중히 결정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한은의 역할임을 강조했다. 앞서 한은은 구조개혁 방안으로 거점도시 육성, 지역별 비례선발제와 같은 정책 제안을 비롯해 고령층 고용과 돌봄서비스 개선, 지식서비스 산업 육성 방안 등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총재는 “구조개혁은 이해관계 충돌이 불가피한 만큼, 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하다”며 “새정부가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개혁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 총재는 디지털 전환과 인공지능(AI) 확산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도 소개했다. 한은은 ‘프로젝트 한강’을 통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기반의 인프라를 시범 구축하고 있으며, 예금토큰 상용화 여부도 검토 중이다.
원화 표시 스테이블코인은 핀테크 산업의 혁신에 기여하면서도 법정화폐의 대체 기능이 있는 만큼, 안정성과 유용성을 갖추는 동시에 외환시장 규제를 우회하지 않도록 제도적 방안을 마련해 관계 기관과 긴밀히 협의해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이와 함께 ‘프로젝트 아고라’를 통해 국가 간 송금비용을 낮추는 글로벌 디지털 인프라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AI 분야에서는 국내 업체가 구축한 ‘Sovereign AI’를 기반으로 한은 특화형 AI를 개발 중이며, 하반기 도입이 목표다. 공공기관 최초로 ‘망개선 파일럿 사업’도 함께 추진해 클라우드 기반 AI 활용을 확대할 계획이다.
이 총재는 “구조개혁이 과거에 누적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라면, 이제는 미래지향적인 시각으로 앞으로 닥칠 도전 과제에도 철저히 대비해 나가야 한다”면서 “무엇보다 디지털 기술과 AI의 급속한 보급으로 금융·경제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지금,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