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실행과 수치로 증명해야”…신동빈, 1박2일 합숙 회의 '초강수'(종합)

경제

이데일리,

2025년 7월 16일, 오후 04:35

[이데일리 한전진 기자] 백척간두 위기에 선 롯데그룹이 초강수를 꺼내 들었다. 창사 이래 처음으로 1박 2일 일정의 VCM(Value Creation Meeting)을 단행하면서다. 화학·유통·식품 등 주력 계열사 부진이 장기화하면서 신동빈 회장의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평가다. 이번 회의는 비효율 사업 정리, 신성장 동력 확보 등 각 계열사의 실행 방안을 직접 들여다보겠다는 신 회장의 의지가 드러난 것으로 풀이된다.

16일 오전 롯데인재개발원 정문 앞에서 경비 인력이 참석 차량을 맞이하고 있다. 이날 오산 인재개발원에서는 롯데그룹 ‘2025 하반기 VCM(옛 사장단 회의)’이 비공개로 진행됐다. (사진=한전진 기자)
◇철통 보안 ‘합숙 회의’…숙식도 내부 해결

16일 오전 9시 경기도 오산 롯데인재개발원 정문 앞. ‘2025년 하반기 롯데그룹 VCM’이 열리는 이 곳에 검은색 세단 차량이 줄지어 진입했다. 정문에는 보안요원 5명이 배치돼 긴장감이 감돌았고, 외부인의 접근은 철저히 통제됐다. 정문 너머로는 차량에서 내린 임원들이 짧은 인사만 나눈 뒤 곧장 건물 안으로 향하는 모습과 로비에서 정장 차림의 인사들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포착됐다.

VCM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줄지어 들어서는 차량들 (사진=한전진 기자)
VCM은 이날 오전 10시께 시작됐다. 대부분의 임원은 9시 30분 전후 행사장에 입장했고 신 회장과 장남 신유열 미래성장실장(부사장)도 비슷한 시각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 시작 시각과 장소는 모두 비공개다. VCM은 롯데그룹이 매년 상·하반기 열어온 전략회의로, 계열사별 사업 현황과 중장기 전략을 공유하는 자리다. 올해도 롯데지주와 주요 계열사 대표 등 임원 약 80명이 참석했다.

그간 VCM은 서울 송파 롯데월드타워에서 하루 일정으로 진행했지만, 이번에는 기간을 늘리고 장소 역시 인재개발원으로 바꿨다. 이곳에서 회의가 열린 건 2022년 리뉴얼 이후 두 번째다. 당시엔 공간 개관 상징성이 컸다면, 이번에는 그룹 차원 위기 극복이라는 목적이 반영됐다는 평가다. 신 회장을 포함한 참석 임원들은 숙박과 식사를 모두 내부서 해결하며 ‘마라톤 회의’를 이어갈 것으로 전해졌다.

◇흔들리는 롯데…화학·유통·식품 전방위 부진

현재 롯데그룹은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그룹의 양대 축인 화학과 유통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어서다. 신동빈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내수 침체 장기화와 불확실성 확대 속에 혁신 없이는 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지난해 롯데온·롯데면세점·세븐일레븐 등 주요 계열사가 인력 감축에 나섰고, 롯데웰푸드(280360)는 올해 창사 이래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정장을 갖춰 입은 인사들이 롯데인재개발원 본관 로비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회의 시작 시각조차 비공개로 진행된 이번 VCM은 철저한 통제 속에 열렸다. (사진=한전진 기자)
롯데케미칼(011170)에서 비롯되고 있는 재무 안정성 우려도 여전하다. 지난해 말 유동성 위기설이 제기되자 롯데는 “석유화학 업황 침체에 따른 일시적 수익성 저하”라고 해명하며, 56조원 규모의 부동산 자산과 15조 4000억원의 예치금을 근거로 반박했다. 올해 초에는 기업설명회를 통해 불안 해소에 나섰지만, 한국신용평가는 5월 “재무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달에는 주요 3개 신용평가사가 롯데케미칼과 롯데지주의 신용등급을 일제히 하향 조정했다.

온라인 쇼핑 보편화와 내수 침체가 겹치며 유통 사업도 녹록지 않다. 롯데마트는 올해 1분기 매출 1조 184억원, 영업이익 67억원으로 전년동기대비 각각 3.4%, 73.5% 줄었다. 식품 계열사들도 마찬가지다. 롯데칠성(005300)음료는 매출 9103억원, 영업이익 250억원으로 각각 2.8%, 31.9% 감소했고, 롯데웰푸드(280360)는 매출이 2.5% 늘었지만 영업이익이 56.1% 줄며 수익성이 크게 악화했다.

◇“몇년째 위기, 말만 반복”…이젠 구체적 ‘실천 방안’

신동빈 회장은 최근 VCM에서 ‘위기’라는 단어를 반복해왔다. 그러나 사업의 부진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고, 단순한 위기 인식 공유만으로는 조직 전체의 변화를 이끌기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이번 회의가 사상 처음으로 1박 2일 일정으로 열린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이제는 구호가 아닌, 각 계열사가 실제 실행 가능한 구체적 계획을 눈앞에 내놓아야 한다는 신 회장의 강한 압박 신호로 해석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왼쪽)이 지난 1월 9일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린 ‘2025 상반기 VCM’에 앞서, 롯데케미칼의 ‘AI 기반 컬러 예측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롯데지주)
이번 회의는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할 것으로 보인다. △비효율 사업 정리 △조직 슬림화 △적자 계열사 구조조정 △해외 투자사업 수익성 점검 △인공지능(AI) 등 신기술 전략 △글로벌 확장 시나리오 등 각 계열사의 생존 전략이 핵심 의제로 오를 전망이다. 특히 롯데케미칼의 해외 프로젝트, 롯데온 구조개편, 롯데쇼핑(023530)의 점포 효율화 등은 그룹의 수익성과 재무 건전성에 직결되는 현안이다. 신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신규 투자안도 ‘성과 중심’ 원칙에 따라 냉정한 평가가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

이번 회의의 구체적인 형식과 세부 일정은 철저히 비공개다. 프레젠테이션 방식일지, 개별 계열사별로 비공개 보고가 이뤄질지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회의 종료 시점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17일 늦은 오후까지 회의가 이어질 가능성도 나온다. 특히 사상 첫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하는 만큼, 신 회장이 밤늦게까지 직접 회의장을 누비며 압박 수위를 높일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종우 아주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젠 위기의식 공유 수준을 넘어야 한다”며 “그동안 ‘알겠다’는 말만 반복됐을 뿐 실제 개선은 없었다. 이번 VCM은 각 계열사 대표들이 실행 계획과 수치로 의지를 증명해야 하는 자리”라고 했다. 이어 “시간만 흘러간 지금, 더는 ‘위기’라는 말로는 설득력이 없다”며 “1박 2일 회의는 행동 없이 버틸 수 없는 롯데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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