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화필리십야드 4도크에서 국가안보다목적선박(NSMV: National Security Multi-Mission Vessel)을 건조하고 있다. (사진=한화오션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이 크레인은 푸른색 도장의 미국 조선소였다. 그러나 2024년 말, 한화오션(지분 40%)과 한화시스템(지분 60%)이 약 1억달러(약 1400억원)를 투자해 인수하면서 조선소는 빠르게 ‘한화의 옷’으로 갈아입었고, 미국의 산업 쇠퇴로 한동안 멈춰 있던 숨을 다시 내쉬고 있었다.
이곳의 공식 명칭은 ‘한화 필리십야드’(Hanwha Philly Shipyard). 한화는 이곳을 단순한 생산 거점이 아니라,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한 전략적 교두보로 설정하고 있다. 상선뿐 아니라 미 해군 함정 시장 진입까지 염두에 둔 전략적 투자다.
조선소 내 4번 도크에서는 미국 해사청(MARAD)이 발주한 국가안보 다목적선박(NSMV)의 건조가 한창이었다. 대형 선박이 도크에 들어가 있었고, 수십 명의 용접공과 기술자들이 용접봉을 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현장 소음과 철내음, 그리고 규칙적으로 울리는 기계음이 ‘살아 있는 조선소’의 맥박을 고스란히 전해줬다.
◇‘한척이 네척’ 되는 마법… ‘K-공법’으로 생산성 도약
4번 도크 앞에는 한화가 인수한 후 사실상 처음 만든 다목적선박(NSMV)이 진수 중이었다. 선박은 길이 140미터, 폭 32미터 규모의 해저 암석설치 선박으로, 미국 동부의 해상 풍력 법제화에 따라 필수적으로 활용될 선박이다. 한화는 애초 올해 말 진수를 예고했던 일정을 무려 5개월 앞당겼다.
필리십야드는 약 1~1.5척의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한화는 한국식 생산관리 기법과 공정 최적화 시스템을 적용해 생산성을 최대 4배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목표를 세웠다.
비결은 ‘도크 회전율’이다. 즉 하나의 도크에서 일정 기간 안에 얼마나 많은 선박을 순차적으로 진수해낼 수 있느냐다. 전통적인 미국식 조선소 운영 방식에서는 선박 한 척을 거의 완성한 뒤 진수하고, 그다음 선박을 새로 건조하는 식으로 진행돼 회전율이 낮다.
한화는 ‘텐덤 공법(Tandem Method)’을 도입할 예정이다. 이 공법은 선박 간격을 최소화해 도크 내 여러 척의 선박을 연속적으로 붙여 짓는 방식이다.
심지어 완전히 건조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설계 단계에서부터 부력 계산을 반영해 중간 조립 선박이 물 위에 뜰 수 있도록 설계한다. 선박 반쪽을 만들어 띄운 후 곧바로 다음 선박을 붙여 바로 진수될 수 있도록 설계·공정·인력을 완전히 연계시키는 것이다. 현재 필리십야드는 도크 내 중간문인 ‘인터미디엇 게이트’(Intermediate Gate)를 활용해 도크 앞쪽에서 선박을 건조하고, 뒤편에서 동시에 다음 선박을 건조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은 게이트 공간을 별도로 써야 해 공간 활용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라는 게 한화측의 설명이다. 이종무 한화필리십야드 조선소장은 “한국에서는 미완성 상태에서도 설계상 뜰 수 있도록 해 선박 앞배를 물에 띄운 후 뒷배도 함께 붙인다”며 “이를 적용하면 연간 4척의 선박 건조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필리십야드는 쌍둥이 구조의 5도크도 보유하고 있다. 현재는 크레인 등 일부 설비가 부족하지만, 동일한 방식으로 업그레이드하면 향후 전체 생산능력을 연간 최대 8척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 회사 측의 전략적 계산이다.

기술 강사 존 윌리엄스(오른쪽)가 견습생 제임스 투니아의 용접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사진=김상윤 특파원)
미국 조선소 노동자의 평균 연봉은 국내보다 2배가량 높다. 반면 생산성은 한국이나 일본 대비 낮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필리십야드는 숙련도와 의욕을 갖춘 인재 양성에 초점을 맞추며 이 격차를 줄이기 위한 실험에 나섰다.
현재 필리십야드에는 약 1800명의 직원이 근무 중이며, 이 중에는 한화의 한국 공장에서 파견된 50여명의 숙련 인력들도 포함된다. 이들은 생산 효율성 제고 및 170명 이상의 견습공 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용접과 같은 핵심 기술은 한국식 집중 훈련 시스템을 도입해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기술 강사 존 윌리엄스는 “생산성 역시 훈련을 통해 충분히 끌어올릴 수 있다”며 “최근 입사한 젊은 세대는 무경력자도 많지만 배움의 의지가 강하고 기술 습득 속도도 빠르다”고 말했다.
견습생들은 입사 첫날부터 정식 직원으로 대우받으며 연봉 5만달러(약 7000만원) 이상, 유급 휴가와 건강보험 등 혜택을 누린다. 일정은 빡빡하다. 월~목은 하루 10시간 현장 근무, 금요일은 도면 읽기와 기술 이론 수업이 병행된다. 그러나 이러한 집중 훈련은 단기간에 실질적인 기술 역량을 쌓는 데 효과적이라는 평가다. 견습생으로 참여 중인 제임스 투니아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하고, 이 프로그램이 조선소 기술뿐 아니라 집에서 간단한 수리나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데도 유용하다”며 “실습과 현장 경험을 통해 진짜 기술을 배우고 있다는 실감이 든다”고 말했다.

한화필리십야드 골리앗크레인이 대형 블록을 이동시키기 위해 준비중이다. (사진=한화오션)
다만 한화필리십야드는 현재 적자 상태에 놓여 있다. 조선소 현대화를 위한 초기 투자 부담이 여전한 데다, 아직 수주 물량과 건조 실적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내 선박 가격이 한국 대비 3~4배 수준으로 높지만 원가 역시 비슷한 수준으로 높아 수익 구조에 부담이 되고 있다. 수주가 일정 수준 이상 확보된다면 수익 전환도 가능하지만, 고율의 관세가 원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또 다른 변수다.
한화필리십야드는 현재 조선용 후판 및 강판 등을 한국과 중국 등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트럼프 행정부의 철강·알루미늄 50% 관세가 적용되고 있다. 일부 계약은 관세 비용을 발주자에 전가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대해 이 소장은 “관세의 영향은 분명하지만, 시장 상황과 규제가 계속 변하고 있어 정확한 손익 분석은 유동적”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박 건조 확대를 위해 한국과의 협력을 시사하고 있는 만큼, 한국산 철강·알루미늄에 대한 관세 예외 조치가 이뤄진다면 당장 수익성이 개선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선박법’(SHIPS for America Act)을 통해 미 조선소에 대한 보조금 지원도 검토하고 있다.
데이비드 김 한화 필리싶야드 최고경영자(CEO)는 “해군의 전투함뿐 아니라 전투지원함 건조에 쓸 추가 국방 예산 200억달러(약 27조8000억원) 이상이 이미 승인됐다”며 “해군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제공요청서(RFI) 2∼3개를 제출했으며,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고 군함수주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정인섭 한화오션 사장(경영지원실장)은 “한화오션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노하우를 한화필리십야드에 전수해 한·미 조선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고, 북미 조선·방산 시장을 선도해 나가겠다”며 “이를 통해 매출 증대와 국내 일자리 창출은 물론, 조선 협력사들과 함께 글로벌 시장을 개척해 나가며 국부 창출의 모범 사례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