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사·세무사' 밥그릇 싸움에 어린이집 등터진 사연[세상만사]

경제

이데일리,

2025년 8월 31일, 오전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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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정민 경제전문기자] 회계사, 세무사. 전문 직역간 ‘밥그릇 싸움’에 애꿎은 어린이집에 불똥이 튀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가 전국 민간위탁 수탁기관에 회계사 회계감사를 의무화하는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긴급 상정하면서다.

명분은 22조원 규모 민간위탁사업의 투명성 강화지만, 현실은 영세 어린이집·복지관은 ‘600만원짜리 폭탄’을 떠안을 상황이다. 원장들은 “존립마저 위협받는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 민간위탁 수탁기관에 회계사 회계감사 의무화…청부입법 논란

행정안전위원회는 지난 26일 법안심사소위원회에 여야 합의로 지방자치법 일부개정법률안을 긴급 안건으로 상정했다. 해당 개정안은 민간위탁 사업을 수행하는 모든 수탁기관에 대해 공인회계사 회계감사를 의무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논란이 일고 있는 법안은 지난 4월 신정훈 행안위 위원장이 대표 발의한 데 이어, 5월에는 야당 박수민 의원이 같은 내용으로 대표 발의한 법안으로 여야 의원들이 같은 취지의 법안을 나란히 발의한 것은 드문 사례다.

특히 수십 건의 지방자치법 개정안이 1년 넘게 계류 중인 상황에서 불과 석 달 전에 발의한 법안이 긴급 안건으로 상정한 것도 이례적이다.

이번 개정안을 두고는 발의 의원들조차 법안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회에서는 관행적으로 보좌진이나 직역단체가 초안을 만들고, 의원들이 취지에 공감하는 수준에서 서명하는 경우가 많아 세부 조항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세무사회는 입장문을 통해 “대표·공동발의자조차 내용을 인지하지 못한 채 서명했다”고 꼬집었다. 세무사회는 이번 개정안을 공인회계사회 청부입법으로 의심하고 있다.

개정안 추진 배경에는 지난해 10월 대법원 판결이 있다. 당시 대법원은 위탁 사업비 결산검사는 회계사법상 ‘회계감사’와는 다른 별개의 제도”라며,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로 세무사에게도 결산검사를 맡길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그동안 회계사들이 사실상 독점해온 민간위탁 감사 영역에 세무사에게도 문이 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실제로 판결 이후 경기도, 충청남도, 경상북도, 전라남도, 제주도 등 여러 광역지자체와 송파구·구미시·경주시 등 기초지자체가 앞다투어 세무사에게 사업비 결산검사를 허용하는 조례 개정안을 발의했다.

공인회계사회는 이를 ‘직역 잠식’으로 판단하고, 아예 법률로 회계감사를 의무화하는 입법 추진에 나선 것이다.

[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 영세 어린이집까지 회계감사 적용…“존립 위협” 반발

행안위와 회계사회는 ‘회계감사 의무화’에 대해 △22조원 규모에 달하는 공공재정 집행의 투명성 확보 △기존 사업비 결산검사의 한계 보완 △부실감사 방지 △세금 낭비 차단 등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행안위는 검토보고서를 통해 “민간위탁사업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재정 운영의 책임성과 신뢰성을 높이려면 외부 회계감사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는 어린이집·복지관 등 민간위탁기관이 다루는 예산 규모가 커지고 있는 만큼, 단순 결산검사만으로는 재정 투명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집과 복지관 등 수탁기관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한국어린이집총연합회는 지난 25일 성명을 통해 “연 600만 원에 달하는 감사 수수료와 추가 결산비용은 영세한 어린이집의 존립 자체를 위협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행안위 보고서에 따르면 회계감사 비용은 민간위탁기관 한 곳당 평균 600만 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민간위탁 기관은 이미 지자체 조례에 따라 ‘사업비 결산검사’를 받고 있다. 세무사나 회계사, 지자체 담당자가 위탁금 집행과 인건비·급식비 지출 등 사업비 사용의 적정성을 점검하는 방식이다. 그런데도 영리기업을 대상으로 설계된 ‘외부 회계감사’ 제도를 그대로 덧씌우는 방식은 불합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어린이집이나 복지관은 영리기업처럼 복잡한 투자·차입 구조가 없는 데다 지출의 80% 이상이 인건비로 단순하게 구성돼 있어 회계 감사 틀을 강제하는 것은 실익보다 비용 부담이 더 크다는 것이다.

특히 평균 600만원 이상 드는 회계감사 비용은 이미 운영비로 빠듯한 수탁기관에는 큰 부담이다. 한국어린이집총연합회는 회계감사 의무화가 결국 보육료 인상으로 이어져 세금을 추가 투입하거나 다른 비용을 줄이기 위한 서비스 축소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지자체의 자치권 침해 문제도 거론된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지자체는 이미 조례로 세무사에게 결산검사를 맡길 수 있는데, 법률로 회계감사를 강제하면 지방의회의 자율성을 무력화하게 된다.

공공성을 강화하기보다 자치권을 침해하고 불필요한 행정·재정 부담만 늘린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또한, 회계사가 충분하지 않은 지방이나 격오지의 경우 감사 진행 자체가 지연돼 현장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세무사회는 이번 개정안을 두고 “회계사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청부입법”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구재이 세무사회 회장은 “민간위탁은 본래 지방자치단체의 자치행정 영역인데, 그 어떤 규정도 없이 회계감사만 의무화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비정상적인 입법”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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