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 정면돌파 나선 오너가 3·4세…‘책임경영’ 가속화[이슈분석]

경제

이데일리,

2025년 11월 30일, 오후 06:54

[이데일리 김은경 기자] 고금리·고환율·글로벌 경기 둔화라는 복합 위기 국면에서 국내 재계의 세대교체 시계가 한층 빨라지고 있다. 그동안 경영 수업이나 후계 구도 준비 차원에 머물렀던 오너 3·4세들이 이제는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와 그룹 핵심 의사결정의 전면에 서서 직접 진두지휘하는 흐름이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특히 불확실성과 투자 리스크가 큰 산업일수록 젊은 오너 경영진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 재계에서는 불황이 길어질수록 전문경영인 체제보다 오너의 책임경영을 요구하는 압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데일리 김일환 기자]
◇불확실성 시대 ‘세대교체·신사업·책임경영’ 키워드

30일 재계에 따르면 이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HD현대의 정기선 회장 체제 출범이 꼽힌다. 이번 정기 인사를 통해 HD현대는 2017년부터 그룹을 이끌어온 권오갑 부회장 중심의 전문경영인 체제에서 오너 3세 회장 체제로 완전히 전환했다. 정 회장은 조선·해양, 에너지, 기계 등 그룹 핵심 사업 전반에서 생산 현장과 해외를 오가며 글로벌 파트너십을 직접 챙기고 있다. 조선업 호황이라는 사업 환경뿐 아니라 미국과의 조선업 동맹, 친환경 전환, 방산 사업 확대 등 고난도 전략 과제들이 동시에 걸려 있다는 점에서 오너의 결단력과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라는 평가다.

사업 재편을 서두르고 있는 롯데그룹 역시 오너 3세의 전면 등장을 알리는 인사를 단행했다. 신동빈 롯데 회장의 장남인 신유열 부사장은 롯데바이오로직스 대표를 맡아 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바이오 사업을 직접 책임지게 됐다. 롯데가 기존 화학·유통 중심 포트폴리오에서 벗어나 글로벌 바이오 산업으로 축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성과로 경영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시험대에 오른 모습이다.

에너지 계열사를 축으로 성장해 온 GS그룹도 오너 3·4세의 존재감이 한층 강화됐다. 오너 3세인 허용수 GS에너지 사장과 4세인 허세홍 GS칼텍스 사장은 이번 인사에서 나란히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그룹 핵심 사업 전면에 나서게 됐다. 글로벌 친환경 에너지 전환과 변동성 확대, 수소·암모니아·전력 신사업 등 복합 과제가 동시에 움직이는 상황에서 오너가 직접 전략과 투자를 지휘하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LS그룹 역시 세대교체 시계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구자열 LS 이사회 의장의 장남으로 오너가 3세인 구동휘 LS MnM 대표는 이번 인사에서 사장으로 승진하며 그룹 내 핵심 자원·소재 사업을 이끄는 전면에 섰다. 전기차, 이차전지, 전력 인프라 등 글로벌 산업 지형의 변화가 거센 분야인 만큼, 오너 일가가 직접 책임지고 투자 판단을 내리는 구조로 전환한 것이다.

◇유통업계 ‘초고속 승진’…3세 경영 속도

유통업계에서도 오너 3세의 승진과 주요 보직 배치가 잇따르고 있다. 식품·소재·콘텐츠 등 경기 변동성 영향이 커지고 글로벌 경쟁이 심화한 환경 속에서 후계자들이 실질적인 의사결정에 참여하며 책임경영에 나선 모습이다. CJ그룹에선 이재현 회장의 장남인 이선호 CJ 미래기획실장이 신설되는 미래기획그룹장을 겸임하며 그룹 중장기 전략과 신사업 발굴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수장을 맡게 됐다.

라면업계를 대표하는 농심과 삼양식품에서는 오너가 3세들의 ‘초고속 승진’이 이어졌다. 삼양라운드스퀘어는 김정수 부회장의 장남인 전병우 운영최고책임자(COO) 상무를 2년 만에 전무로 승진시켰다. 농심은 신동원 회장의 장남인 신상열 미래사업실장을 1년 만에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SPC그룹에서는 허영인 회장의 장남이자 오너 3세인 허진수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허 부회장은 파리크라상 최고전략책임자(CSO)와 글로벌BU장으로 파리바게뜨의 해외 사업을 총괄해 왔다. 차남인 허희수 비알코리아 부사장도 사장직에 오르며 그룹 내 오너 경영 체제가 한층 공고해졌다.

재계에선 오너 3·4세의 전면 등장이 구조적 환경 변화에 따른 필연적 흐름이라고 분석한다. 고금리 환경에서 투자 재원 조달이 쉽지 않고 미·중 갈등에 따른 공급망 리스크와 탄소 규제, 글로벌 보호무역 강화가 동시에 압박하는 상황에서 보수적 성향의 전문경영인 체제만으로는 과감한 전략 전환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대규모 선행 투자가 필수적인 산업일수록 실패의 책임을 스스로 떠안을 수 있는 오너의 의사결정이 요구되고 있다는 해석이다.

다만 세대교체가 성공 사례로 남기 위해서는 글로벌 불확실성 속에서도 투자 전략을 유지할 수 있는 판단력이 중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경영인과의 역할 분담과 노동·안전·지배구조 개선 등 비재무적 리스크 관리 능력도 요구된다. 재계 관계자는 “지금의 오너 3·4세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그룹의 키를 넘겨받은 세대”라며 “이번 세대교체가 향후 10~20년 국내 산업 지형과 경쟁력을 좌우할 결정적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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