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위스키 개척자' 도정한의 뚝심, 고추 캐스크로 위스키 본고장 뚫는다

경제

이데일리,

2025년 12월 16일, 오후 06:58

[이데일리 신수정 기자] “어느 날 마스터 디스틸러 앤드류가 저를 양조장 구석 ‘비밀의 방’으로 데려가더군요. 오크통에서 숙성 중인 샘플을 조심스럽게 꺼내 맛보여주는데, 위스키에서 난생 처음 느껴보는 매운맛이 났습니다. 처음엔 혀를 의심했죠.”

대한민국 최초의 싱글몰트 증류소 ‘기원 위스키’를 이끄는 도정한 대표가 16일 서울 라이즈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껄껄 웃으며 회상했다. 위스키의 본고장 스코틀랜드 출신이자 40년 경력의 장인 앤드류 샌드(Andrew Shand)가 “한국의 고추로 위스키를 만들어보자”는 자칫 ‘미친 짓’으로 보일 법한 제안을 건넨 순간이었다.

기원 위스키가 16일 ‘기원 위스키 레드 페퍼 캐스크’를 내놨다. 왼쪽부터 앤드류 샌드, 에드워드 리, 도정환. (사진=기원 위스키)
이날 도정한 대표는 그 무모해 보이던 도전을 현실로 만든 결과물, ‘기원 위스키 레드 페퍼 캐스크(Ki One Red Pepper Cask)’를 세상에 내놨다. 쉐리나 버번 캐스크(오크통)라는 수백 년 된 위스키의 불문율을 깨고, 가장 한국적인 식재료인 ‘고추’로 전 세계 위스키 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스코틀랜드 장인이 한국 재래시장에서 고추 10kg 산 사연

이날 현장에서 좌중을 사로잡은 것은 위스키 개발 뒷이야기였다. 엄격한 정통 방식을 고수해온 앤드류 샌드가 고추 위스키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도정한 대표는 말리는 대신 지갑을 열어줬다.

앤드류는 “가장 한국적인 매운맛을 찾기 위해 아내를 데리고 한국의 재래시장을 샅샅이 뒤졌다”며 “가장 강력하고 맛있는 매운맛을 내는 고추를 찾아내 10kg을 샀다”고 말했다. 이어 “시장에서 외국인이 고추를 10kg이나 사는데, 주인 할머니가 10원 한 장 안 깎아주더라”는 농담을 던져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도정한 대표는 앤드류의 이러한 기행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도 대표는 “기원 위스키의 창업 정신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라며 “앤드류가 시장바닥을 누비며 찾아낸 그 매운맛이야말로 기원 위스키가 글로벌 시장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고 말했다.

◇캡사이신 주입? NO…시즈닝으로 완성한 격조 있는 매운 맛

레드 페퍼 캐스크는 단순히 위스키에 고추를 넣어 맵게 만든 1차원적인 술이 아니다. 이 제품은 전 세계 최초로 시도된 고추 캐스크 시즈닝(Seasoning) 공법으로 탄생했다. 국내산 홍고추와 뜨거운 물을 캐스크에 담아 통 자체에 고추의 향을 입힌 뒤, 그 물을 빼내고 기원 위스키 원액을 채워 다시 숙성하는 방식이다.

도 대표는 “첫 모금부터 혀를 때리는 자극적인 매운맛이 아니라, 위스키 본연의 달콤한 바닐라 향과 어우러지다 피니시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는 알싸한 ‘킥(Kick)’을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앤드류는 “처음엔 진(Gin)을 만들려고 고추를 찾아다녔는데, 위스키에 적용해보니 훨씬 독특하고 매력적이었다”며 “단순히 입안을 마비시키는 매운맛이 아니라, 위스키의 풍미와 고추의 ‘열기’가 조화를 이루는 밸런스를 찾는 데 집중했다”고 강조했다.

이번 제품은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으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에드워드 리 셰프가 브랜드 앰버서더로 참여해 그 의미를 더했다. 도 대표는 “에드워드 리 셰프는 요리를 통해 국경과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혁신을 보여준 인물”이라며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두 문화를 융합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그야말로 기원 위스키가 추구하는 가치를 가장 잘 대변한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에드워드는 “한국의 역동적인 사계절이 빚어낸 기원 위스키의 독창적 풍미에서 켄터키 버번과는 또 다른 매력과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꼈다”고 화답했다.

이날 현장에서 에드워드 리는 직접 개발한 김치 퓨레를 곁들인 떡볶이와 프라이드 치킨을 위스키와 함께 선보였다. 레드 페퍼 캐스크 위스키는 55도에 달하는 높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매운맛이 목 넘김을 방해하기보다 입안을 개운하게 정리해주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했다. 음식의 맛과 조화를 이뤄 풍미가 더욱 깊어졌으며 이어 올라오는 후끈함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에드워드 리는 직접 개발한 김치 퓨레를 곁들인 떡볶이와 프라이드 치킨을 레드 페퍼 캐스크 위스키와 함께 선보였다. (사진=기원 위스키)
◇한국만의 독창성으로 미국시장 정조준

도정한 대표의 시선은 이제 국내를 넘어 세계 최대 주류 시장인 미국을 향해 있다. 이번 레드 페퍼 캐스크 위스키는 실험적인 성격이 강한 만큼 전 세계적으로 1500여병만 한정 생산했다.

도 대표는 “생산된 1500병 중 200병은 미국 수출을 위해 따로 빼놨다”고 귀띔했다. 국내 물량을 대기도 빠듯한 상황이지만, 위스키의 본고장인 미국 시장에 한국의 매운맛을 보여주겠다는 도 대표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결정이다. K푸드의 열풍으로 한국의 매운맛에 대한 거부감이 호기심으로 바뀐 지금이 적기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이어 도 대표는 “스코틀랜드나 일본 위스키를 흉내 내는 것만으로는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가장 한국적인 식재료와 기후가 만들어낸 독창적인 맛만이 우리의 경쟁력”이라며 “레드 페퍼 캐스크 위스키는 전 세계 위스키 애호가들에게 ‘한국 위스키가 이런 맛도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렬한 명함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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