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토탈에너지스 대산 공장 전경.(한화토탈에너지 제공)
중동 정세 불안이 장기화하면서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불가항력(Force Majeure)'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정부가 긴급하게 나프타 물량을 확보하는 등의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현장 도입까지 걸리는 시차 탓에 생산 차질은 이미 현실화했다. 업계는 설비 가동을 최소화하며 버티기에 돌입했지만 수익성 악화와 수급 불안이 겹치며 사면초가에 몰린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석유화학 산업 구조 개편마저 산단별 이해관계에 막혀 데드라인을 앞두고 표류하고 있어 업계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정부 지원에도 도입 '시차'… 현장은 불가항력 도미노
18일 업계에 따르면 여천NCC에 이어 한화토탈에너지스까지 파라자일렌(PX) 공급에 대한 불가항력을 선언하며 공급 차질이 업계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불가항력은 외부 요인으로 계약 이행이 불가능할 때 법적 책임을 면제받는 조치로, 기업들이 사실상 정상적인 제품 공급이 불가능함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은 중동 지역 긴장 고조에 따른 원료 수급 불안이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나프타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상당 물량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해당 해역의 물류 불안이 장기화하면서 원료 도입 차질이 곧바로 생산 차질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주요 기업들은 재고를 활용하며 버티기에 나섰다. 평균 1~2개월 수준의 원료를 바탕으로 가동률을 50~60% 수준으로 낮추거나 정기보수를 앞당기는 방식이다. LG화학은 여수 NCC 2공장 가동을 중단했고 롯데케미칼은 대정비 일정을 예정보다 3주 앞당겼다. 여천NCC 역시 일부 공정 가동을 멈추며 생산량을 조정하고 있다.
정부는 카자흐스탄,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에서 연말까지 최대 210만t의 나프타를 확보하고 가격 차액의 50%를 지원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정책 효과를 체감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중동에서 확보한 물량이 국내에 도입되기까지 최소 40일 이상이 소요되고, 이후 기업별 배분과 투입 과정에서도 추가 시간이 필요하다.
업계 관계자는 "재고가 바닥을 보이는 상황에서 정부 지원 물량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감산이나 정기보수 조기 시행 외에는 방법이 없다"며 "업계에서 전면 중단은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셧다운 시 발생하는 막대한 재가동 비용과 리스크로 인해 억지로 불씨만 살려놓은 상태"라고 토로했다.
1일 전남 여수시 여수국가산단 내 여천NCC에서 나프타 가공 설비가 가동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6.4.1 © 뉴스1 유승관 기자
시급한 사업재편, 현실은 '발 묶인 구조조정'…"제약 너무 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석유화학 산업 구조 개편까지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는 최근 특별법 시행령을 통해 인허가, 환경, 공정거래 규제 특례를 마련하며 사업재편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사실상 기업들에 구조조정 데드라인을 제시한 셈이다. 중국의 자급률 상승으로 기존의 수입 원료 기반 생산·수출 모델이 한계에 직면했다는 진단 때문이다.
하지만 현장의 합의는 지지부진하다. 주요 산단 중 대산과 여수에서만 각각 한 개의 프로젝트만 추진 중일 뿐나머지 산단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울산 산단의 경우 에쓰오일의 대규모 설비 증설 프로젝트인 '샤힌 프로젝트'가 최대 변수다. 기존 업체들이 생산량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대규모 신규 물량이 쏟아지는 것에 대한 형평성 논란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LG화학과 GS칼텍스의 합작법인 설립 논의도 글로벌 대주주의 이해관계 조율 문제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CIS는 한국 석화 산업의 가동률이 2030년 70% 수준까지 떨어질 것으로 경고하며 과감한 결단을 주문하고 있지만 당장의 원료 확보에 급급한 기업들에 사업재편은 먼 나라 이야기다.
당장의 원료 수급 위기 속에서 기업들이 중장기 구조 개편까지 병행하기는 쉽지 않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공장을 멈추지 않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며 "원료 확보와 가동 유지에 총력을 쏟는 상황에서 사업재편 논의까지 속도를 내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크다"고 말했다.
khan@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