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금융 운영체제 바뀐다…한국 또 늦을 것인가

경제

이데일리,

2026년 September 25일, AM 06:02

금융의 운영체제가 바뀌고 있다. 블록체인과 토큰화는 이제 가상자산이나 조각투자의 영역을 넘어 주식·채권·펀드·결제·담보 등 금융시장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박도현 가천대 금융수학과 교수·파이랩테크놀로지 대표가 세 차례에 걸쳐 이 변화가 한국 금융에 갖는 의미와 대응 방향을 짚어본다. 1부에서는 ‘왜 지금 온체인 금융인가’, 2부에서는 ‘정부는 어떤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가’, 3부에서는 ‘금융회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살펴본다.

[박도현 가천대 금융수학과 교수·파이랩테크놀로지 대표] 10년 전만 해도 한국은 세계 블록체인 시장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자산을 거래했고, 수많은 블록체인 프로젝트와 개발자, 투자자들이 한국을 찾았다.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속도와 시장의 열기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돌이켜보면 한국은 블록체인 시대를 누구보다 먼저 경험한 나라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앞선 출발을 금융산업의 경쟁력으로 연결하지 못했다. 지난 10년 동안 블록체인을 주로 가상자산 가격과 투기, 거래소 규제의 문제로 바라보는 사이 기술은 빠르게 진화했다. 블록체인은 이제 코인을 사고파는 기술을 넘어 주식과 채권, 펀드와 현금, 담보와 결제가 움직이는 금융 인프라를 다시 설계하는 기술이 되고 있다. 우리가 규제와 투자자 보호라는 당연히 필요한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세상의 질문은 이미 “가상 자산을 허용할 것인가”에서 “미래 금융시장을 어떤 기술 위에 만들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변화가 더욱 아쉽다. 한국은 결코 기술이 부족한 나라가 아니다. 반도체와 조선, 자동차, 배터리, 방산에서는 세계시장을 선도한다.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가 발표한 2025년 글로벌혁신지수에서도 한국은 139개국 가운데 세계 4위이고 인적자본과 연구 부문은 세계 1위다. 그런데 같은 나라의 2026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금융 부문은 29위다. 문제는 한국이 혁신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기술적 역량을 금융의 혁신으로 연결하는 데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는 데 있다.

더 상징적인 장면도 있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이자 거대한 자본시장을 가지고 있지만,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은 한국 금융시장은 외국인 투자자가 원화를 환전하고 자금을 옮겨 주식을 사고 결제하는 과정이 여전히 불편하다고 평가했다. 첨단 제품은 세계에 팔면서 정작 글로벌 자본이 한국 금융시장으로 드나드는 방식은 여전히 불편하다는 이야기다.

(사진=제미나이)
(사진=제미나이)
그래서 최근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 17일 미국 증권 거래위원회(SEC)는 일정한 조건 아래 미국 증시에 상장된 주식을 토큰화해 온체인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한시적 규제 면제를 허용했다. ‘모든 미국 주식을 마음대로 토큰화하도록 허용했다’는 식의 표현은 정확하지 않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SEC 스스로 미국 자본시 장을 온체인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하고 있다.

더 중요한 변화는 월스트리트의 뒤편에서 벌어지고 있다. 미국의 핵심 예탁결제기관 DTCC는 지난 7월 실제로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증권을 토큰으로 전환해 실거래까지 처리했다. 오는 10월에는 토큰화 서비스를 정식 출시할 예정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 골드만삭스, 씨티, HSBC, 블랙록 등 50개가 넘는 전통 금융·디지털자산 기업들이 개발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토큰화는 더이상 가상자산 업계의 실험이 아니다. 기존 금융시장 자체가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토큰증권’이라고 하면 빌딩이나 미술품을 잘게 쪼개 여러 사람이 투자하는 조각투자를 먼저 떠올린다. 바로 이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토큰화의 진짜 의미는 자산을 잘게 쪼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금융을 프로그램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주식을 한 주 산다고 생각해 보자. 스마트폰에서는 버튼 한 번이면 끝나는 것 같지만 그 뒤에서는 증권사, 거래소, 청산기관, 예탁기관, 수탁기관과 은행의 서로 다른 시스템이 움직인다. 거래가 맞는지 확인하고, 돈과 증권을 옮기고, 서로 다른 장부를 다시 맞춘다.

그러나 주식과 채권, 펀드 그리고 돈까지 모두 프로그래머블한 디지털 자산이 되면 전혀 다른 금융이 가능해진다. 주식을 사는 순간 돈과 주식이 동시에 이동한다. 받은 채권을 즉시 담보로 맡기고 대출을 받을 수 있다. 대출조건이 충족되면 자금이 자동 지급되고, 이자와 배당 역시 자동으로 분배될 수 있다. 지금은 여러 금융회사와 전산망을 거쳐야 하는 하나하나의 과정이 하나의 네트워크에서 연속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온체인 금융이다. 인터넷의 혁신이 종이신문을 화면으로 옮긴 데 있었던 것이 아니듯, 토큰화의 혁신도 종이 증서를 디지털 토큰으로 바꾸는 데 있지 않다. 인터넷은 정보가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결합되는 방식을 바꿨다. 온체인 금융은 금융자산이 발행되고 거래되고 결제되고 담보로 사용되는 방식을 바꿀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의 경쟁은 ‘어떤 부동산을 먼저 토큰화 했느냐’가 아닐 것이다. 주식·채권· 펀드·현금·담보·대출을 누가 하나의 금융 네트워크 안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연결할 것인가의 경쟁에 가까워질 것이다.

한국도 이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4일 기존 조각투자를 넘어 주식·채권·펀드 등 정형증권까지 토큰화를 확대하고, 한국거래소를 중심으로 장내시장 토큰 화 거래 파일럿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내년 2월부터 단계적인 제도 시행도 예정돼 있다.

문제는 속도와 시야의 차이다. 미국에서는 SEC가 상장주식의 온체인 거래를 실제로 열기 시작했고, DTCC는 이미 실거래를 끝냈다. 세계의 논의는 ‘토큰증권을 허용할 것인가’에서 ‘기존 자본시장 전체를 어떤 방식으로 온체인과 연결할 것인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지난 수년 동안 한국은 블록체인과 가상자산을 주로 ‘투기냐 아니냐’, ‘규제할 것이냐 허용할 것이냐’의 문제로 바라봤다. 그러나 그 사이 블록체인은 코인을 거래하는 기술에서 금융 인프라를 재설계하는 기술로 진화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의 기회가 있다. 기존 금융에서는 뉴욕과 런던이 수십년 동안 축적한 금융회사, 자본, 인재와 네트워크를 단기간에 따라잡기 어렵다. 그러나 온체인 금융은 아직 세계적으로도 표준과 승자가 정해지지 않은 영역이다.

더구나 금융이 점점 소프트웨어 산업의 성격을 갖게 된다면 경쟁의 조건도 달라진다. 세계 4위의 혁신역량, 강력한 IT 인프라와 세계적 수준의 제조·기술기업을 보유한 한국이 기존 금융질서에서 보다 새로운 금융 인프라 경쟁에서 다른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토큰화에는 새로운 위험도 있다. 투자자 보호, 법적 소유권, 사이버 보안, 시장 안정성, 유동성 관리라는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도 단순히 ‘규제를 풀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세계가 차세대 금융의 운영체제를 만들고 있을 때 한국은 그것을 나중에 수입해 사용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 설계 과정에 참여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

지난 산업화 시대 한국은 남들이 만든 기술을 빠르게 따라잡았다. 반도체와 조선에서는 결국 세계 정상에 섰다. 디지털 시대에는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겨냥한 IT 기업들도 만들어 냈다.

이제 금융에서도 그런 순간이 오고 있을지 모른다. 토큰거래 하나를 더 허용하는 문제로 보면 작은 변화다. 그러나 금융의 운영체제가 바뀌고 있다고 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번에는 너무 늦게 알아차리지 않았으면 한다.

박도현 가천대 금융수학과 교수·파이랩테크놀로지 대표. △미국 미시간대 금융공학 박사 △한국투자증권·하나증권·미래에셋증권 △가천대 경영대학 교수(2014년~) △파이랩테크놀로지 창업자 겸 대표(2017년~)
박도현 가천대 금융수학과 교수·파이랩테크놀로지 대표. △미국 미시간대 금융공학 박사 △한국투자증권·하나증권·미래에셋증권 △가천대 경영대학 교수(2014년~) △파이랩테크놀로지 창업자 겸 대표(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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