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 솔리다임 CI
지난 8월부터 한국거래소가 중복상장 심사를 대폭 강화하면서 이제 상장사의 자회사를 상장하는 건 꽤 까다로운 일이 됐습니다. 예전에는 기업이 자금조달 필요성을 앞세워 상장하는 게 가능했다면 이제는 "왜 굳이 자회사를 따로 상장해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기존 모회사 주주는 무엇을 얻는지"까지 설명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상장사가 지배하는 자회사까지 증시에 입성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여러 사업을 거느린 기업이라도 모회사 한 곳만 상장하는 구조가 일반적입니다. 구글, 유튜브 등 여러 사업을 거느린 알파벳도 자회사를 따로 상장시키지 않고 알파벳 주식만 증시에서 거래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중복상장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건 LG에너지솔루션(373220)의 상장이었습니다. LG화학(051910)은 2020년 배터리 사업을 물적분할해 LG에너지솔루션을 세웠고, LG에너지솔루션은 2022년 코스피에 상장했습니다.
특히 '물적분할'이 문제였는데요. 인적분할을 하면 기존 주주가 분할된 회사의 주식을 일부 받을 수 있지만 물적분할은 새로 만들어진 회사의 주식을 모회사만 갖습니다.
LG화학의 주주 입장에서는 배터리 사업의 성장성을 보고 투자하고 있었는데 돌연 배터리 사업이 떨어져 나간 셈입니다.
물론 LG화학이 LG에너지솔루션 지분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배터리 사업의 가치가 LG화학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모회사 할인'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성장 사업을 직접 보유할 수 있는 자회사 주식이 따로 거래되기 시작하면 투자자들이 굳이 모회사를 거쳐 간접적으로 투자할 이유가 줄어들겠죠.
남길남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자회사 상장 이후 모회사의 기업가치가 상장 이전보다 30% 이상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나현승 고려대학교 교수 역시 자회사 상장 이후 6개월 동안 모회사의 주가는 평균 약 11% 이상 하락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금융당국이 칼을 빼 들었습니다.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는 중복상장을 '원칙 금지·예외 허용'하는 방향으로 심사 체계를 바꿨습니다. 모회사 일반주주의 권익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중복상장은 막겠다는 취지입니다.
3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덕산넵코어스 코스닥시장 상장기념식 (한국거래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6.9.30 © 뉴스1
모든 자회사 상장의 문을 닫은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지난달 덕산넵코어스(266690)는 새 중복상장 기준에 따라 예외적으로 상장을 허용받은 첫 사례로 코스닥 시장에 입성했습니다. 모회사 덕산하이메탈(077360)이 자회사 주식 현물배당 등 일반주주 보호 방안을 마련한 덕분입니다.
거래소는 자회사의 영업·경영 독립성, 상장의 필요성, 모회사 일반주주 보호 등을 따져 예외적으로 상장을 허용합니다. 또 모회사 이사회에는 자회사 상장이 주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평가하고, 주주보호 방안을 마련하고, 주주와 소통한 뒤 이사회가 찬반을 결정해 이를 공시하는 '5대 의무'가 부과됩니다.
과거에는 물적분할을 통해 자회사를 상장시키는 기업은 "외부에서 투자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면 쉽게 상장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기존 주주에게는 뭐가 좋은지"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시장의 관심은 SK하이닉스(000660)로 쏠립니다. SK하이닉스의 손자회사인 미국 낸드플래시 기업 솔리다임이 이르면 내년 미국 증시에 상장할 수 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면서 '중복상장'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솔리다임은 SK하이닉스가 2021년 인텔의 낸드·SSD 사업을 인수하면서 출범한 회사입니다. 최근 AI 데이터센터 확대로 기업용 SSD(eSSD) 수요가 늘면서 대규모 투자 필요성도 커지고 있습니다.
중복상장의 딜레마는 여기서 드러납니다. 솔리다임이 별도로 상장해 외부에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면 SK하이닉스가 투자비를 직접 부담하지 않아도 됩니다. 솔리다임이 확보한 돈으로 투자해 기업가치를 키운다면 결과적으로 솔리다임 지분을 보유한 SK하이닉스에도 호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주 발행으로 외부 투자자를 유치해 SK하이닉스 지분율이 낮아진다면 SK하이닉스 주주에게 그다지 호재는 아니겠죠.
중복상장의 핵심은 '하느냐, 마느냐'가 아닙니다. 자회사가 정말 독립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지, 얼마를 조달해 어디에 쓸 것인지, 모회사의 지분이 얼마나 희석되는지 등을 다각도로 살펴봐야 합니다..
© 뉴스1 김지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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