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개혁 전도사' 이창용의 부탁[현장에서]

경제

이데일리,

2026년 October 07일, AM 06:16

[이데일리 장영은 기자]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6일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인구클러스터 포럼.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서울대 특임교수)는 한은 연구진과 쓴 근로시간 제도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노동계·경영계·학계의 공방이 한참 오간 뒤 마이크를 잡았다. 총재 재임 시절부터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해 온 그가 토론 말미에 꺼낸 것은 제언이나 총평이 아닌 “지금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는 부탁이었다.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6일 서울대 우석경제관에서 열린 국가미래전략원 인구클러스터 포럼 토론 세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장영은 기자)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6일 서울대 우석경제관에서 열린 국가미래전략원 인구클러스터 포럼 토론 세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장영은 기자)
한은 총재 퇴임 후에도 이례적으로 대외 활동을 활발히 이어가며 구조개혁을 강조하고 나선 이 전 총재의 목소리에는 어느 때보다 깊은 위기의식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이 전 총재는 우리 노동 제도가 지난 20~30년간 블루칼라 중심으로 성장하던 시기의 틀을 그대로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제는 화이트칼라가 열심히 일해야 나라가 잘 살 수 있는데 노동법과 제도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한계 근로자를 구분하지 않고 대기업 노조 가입 근로자 중심으로 짜여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그는 “이 체제로 국민경제 전체가 잘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고민이 필요한 때라고 쓴소리를 했다.

그가 꼽은 걸림돌은 법적 불확실성이다. 주 52시간제가 도입됐을 때 이름만 대면 아는 외국계 대형 금융사가 한국 데스크(본부)를 크게 줄이고 홍콩·싱가포르로 옮겼다는 사례를 소개했다. 재량근로제가 있지 않으냐고 묻자 돌아온 답은 이랬다고 한다. 처음에는 근로자와 합의해도 사이가 틀어진 뒤 “억지로 시켰다”며 소송을 걸면 책임은 전부 사용자에게 돌아오는데, 그런 위험을 안고 고연봉 근로자를 한국에서 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익을 나누기로 하고 밤새 일하던 벤처 투자자들 사이도 관계가 틀어지면 52시간 위반으로 법적 분쟁으로 갈 수 있단 리스크도 들었다.

이날 포럼의 논란을 지켜보며 머리를 스쳐 간 본질은 ‘단순히 주 몇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일할 것인가(

’라는 기계적 조율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앞으로 어떤 길을 선택해 나갈 것인가’에 관한 갈림길의 문제라고 느꼈다.

비유하자면 우리가 서 있는 다리의 한쪽에는 ‘유럽형 모델’이 있다. 이 전 총재는 유럽만큼 근로시간을 더 줄여야 한단 취지의 의견에 대해 “유럽이 과연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델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유럽은) 근로시간을 줄이면서 비용을 유지하느라 혁신 기업이 사라졌고, 글로벌 고소득 하이테크 시장에서 유럽의 화이트칼라는 미국에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겼다”며 냉정하게 비판했다. 성장과 생산성이 멈춘 사회는 겉보기엔 평온할지 몰라도 결국 청년과 미래 세대의 선택지를 뺏는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을 직격한 것이다.

다른 한쪽에는 힘에 부치고 진통이 따르더라도, 유연성과 성과 보상을 적절히 결합해 성장과 혁신을 이뤄내는 길이 있다. 미국처럼 일정 보수 이상의 관리·전문직에 근로시간 한도와 수당 규제를 풀되(화이트칼라 이그젬션), 확실한 성과 인센티브와 연속 휴식 등 건강보호장치를 안기는 방식이다. 그 과정에선 제도의 악용을 막기 위한 안정장치를 마련하고, 소득을 높이기 위해 더 일할 수 있고 또 일하고 싶은 근로자들을 보호하면서도 기회를 열어주는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 전 총재는 “반도체 특구 등 일부 메가 프로젝트에만 핀셋 예외를 두자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연구개발(R&D), 정보기술(IT) 등 대한민국 경제의 엔진이 될 고숙련 지식기반 직종 전반으로 ‘한국형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광범위하게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길이 있을 수도 있다. 가보지 않은 길이고 우리가 개척해야 하는 길이다. 유럽 혹은 미국을, 우리의 경험도 반면교사 삼아야 할 것이다. 다만,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인구 감소와 인공지능(AI) 대전환기 속에서 우리 경제가 지속 성장하고 미래 세대에게 기회라는 자산을 물려 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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