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천연가스 재고율이 73%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포인트(p) 낮아지자 겨울철 액화천연가스(LNG)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올해 4분기 유럽의 LNG 수입량은 전년 동기 대비 6.5%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이 부족한 재고를 채우기 위해 미국산 LNG 확보에 나서면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LNG 도입 가격에도 상승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지난 9월 미국산 LNG 화물의 53%가 유럽과 튀르키예에 도착한 반면 아시아·태평양 지역 도착 물량은 전월 420만 톤에서 270만 톤으로 36% 감소했다. 중동 전쟁으로 글로벌 LNG 공급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물량 확보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유럽 가스 재고 73% 그쳐…미국산 LNG 절반 이상 유럽행 11일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유럽연합(EU)의 천연가스 저장률은 9일 기준 73.3% 수준에 머물렀다. 지난해 같은 기간 약 83%는 물론 최근 5년 평균인 약 88%에도 크게 못 미친다.
네덜란드 소재 글로벌 금융그룹 ING는 지난 6일 유럽의 가스 재고가 겨울철 목표 수준인 80%에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겨울철 기온이 예상보다 낮거나 추가적인 공급 차질이 발생하면 가스 가격 변동성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우려다.
유럽의 가스 가격은 이미 큰 폭으로 올랐다. 유럽 천연가스 가격의 기준인 네덜란드 TTF 선물 가격은 9일 기준 메가와트시(MWh)당 약 77유로로, 1년 전 약 32유로보다 140%가량 상승했다.
유럽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과 중동 등으로 수입선을 다변화해 왔다. 그러나 올해 중동 전쟁으로 LNG 공급과 해상 운송에 차질이 발생하면서 수입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럽이 겨울철 재고 확보에 나서면서 미국산 LNG도 유럽으로 집중되고 있다.
S&P글로벌 에너지 CERA에 따르면 지난 9월 미국산 LNG 화물 143척 가운데 76척이 유럽과 튀르키예에 도착했다. 전체의 약 53%에 해당한다. 같은 달 미국에서 선적된 LNG 화물 156척 가운데 85척(54%)도 유럽과 튀르키예를 향한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9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도착한 미국산 LNG 화물은 41척으로 전체의 29%에 그쳤다. 비중은 8월 36%에서 7%포인트(p) 하락했다. 도착 물량도 같은 기간 420만 톤에서 270만 톤으로 감소했다.
유럽이 미국산 LNG의 주요 수요처로 자리 잡으면서 겨울철 글로벌 LNG 시장의 수급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럽 수입 확대에 아시아 LNG 가격도 상승 압력…한국 도입비 부담 우려
문제는 유럽의 LNG 확보 경쟁이 한국의 수입가격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LNG는 원유와 마찬가지로 국제시장에서 거래되는 에너지원이다. 특히 미국산 LNG를 비롯한 일부 현물 물량은 유럽과 아시아의 가격 차이에 따라 공급처가 달라질 수 있다. 유럽 구매자들이 높은 가격을 제시해 물량을 확보하면 아시아 수입국들도 필요한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구매가격을 높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유럽과 아시아의 LNG 현물가격은 모두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S&P글로벌에 따르면 지난 5일 기준 북서유럽 LNG 가격은 100만BTU당 23.56달러, 동북아시아 LNG 현물가격 지표인 JKM은 25.569달러를 기록했다. 두 지역 모두 1년 전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다만 유럽의 가스 가격이 상승한다고 한국의 LNG 도입가격이 곧바로 같은 폭으로 오르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장기계약과 현물 구매를 병행하고 있으며, 장기계약은 국제유가나 미국 천연가스 가격 등에 연동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겨울철 예상보다 많은 물량을 현물시장에서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면 국제 LNG 가격 상승이 국내 도입 비용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중동발 공급 차질이 장기화하거나 겨울철 한파로 유럽과 아시아의 수요가 동시에 늘어날 경우 부담은 더욱 커질 수 있다.
국내에서는 한국전력과 한국가스공사가 LNG 가격 상승에 따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한국전력은 LNG 발전단가 상승이 전력도매가격(SMP)에 반영될 경우 발전사로부터 전력을 구매하는 비용이 늘어날 수 있다. 한국가스공사 역시 LNG 도입 원가가 상승하면 원료비 부담이 커진다. 상승한 원료비가 도시가스 요금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을 경우 미수금이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반면 LNG와 액화석유가스(LPG)를 모두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SK가스의 울산 GPS는 상대적인 수혜를 기대할 수 있다. LNG 가격 상승으로 SMP가 오르는 상황에서 LPG를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조달할 수 있다면 발전 수익성이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 이익은 LNG와 LPG의 상대가격, 발전소 가동률 등에 따라 달라진다.
장기계약·공급선 다변화로 대응…현물가격 급등은 여전히 변수
국내 에너지 기업들은 LNG 장기계약과 공급선 다변화를 통해 국제 가격 변동에 따른 위험을 줄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한국가스공사는 지난해 8월 글로벌 에너지 기업 트라피구라(Trafigura) 등 공급업체들과 2028년부터 약 10년간 미국산 LNG를 연간 약 330만 톤 도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올해 5월에는 글로벌 에너지 기업 BP와 2028년부터 10년간 연간 70만 톤을 추가 도입하는 장기계약도 맺었다.
장기계약을 통해 안정적인 물량을 확보하고 중동에 집중된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는 전략이다.
SK이노베이션 E&S도 북미와 호주 등 다양한 지역에서 LNG를 조달하고 있다. 트레이딩 법인 프리즘 에너지 인터내셔널을 통해 국제유가와 미국 헨리허브 가격에 연동되는 장기계약 물량, 현물시장 물량 등을 조합해 조달 구조를 운영하고 있다.
다만 장기계약이 가격 상승 위험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아니다. 계약에 적용되는 가격 산식에 따라 국제유가나 천연가스 가격 상승이 도입 비용에 반영될 수 있고, 부족한 물량을 현물시장에서 구매해야 할 경우 가격 변동에 직접 노출될 수 있다.
결국 올겨울 국내 LNG 수입 비용을 좌우할 핵심 변수는 유럽의 가스 재고 확보 속도와 중동발 공급 차질, 아시아 지역의 난방 수요가 될 전망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유럽의 겨울철 비축 수요와 중동발 공급 불안이 장기화할 경우 국내 기업들도 가격 변동과 조달 여건을 함께 살펴야 한다"며 "계약 포트폴리오 관리와 공급선 다변화의 중요성이 커질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