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이 금리를 바꾸기도 전에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는 말 한마디가 시장금리를 움직이는 시대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은 이처럼 사람들이 미래를 내다보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거시경제 정책의 설계도로 바꾼 두 경제학자에게 돌아갔다.
로버트 E. 홀(83)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가계 소비가 '미래에 대한 기대'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실증했고, 마이클 우드퍼드(71)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기대의 역할을 거시경제 정책 분석에 반영해 오늘날 중앙은행의 금리 결정에 활용되는 '뉴케인지언 모형'의 이론적 체계를 정립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12일(현지시간) 두 사람에게 2026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여한다고 발표하며 수상 이유로 '거시경제 안정화의 미시경제적 기초' 확립을 꼽았다. 상금 1200만 크로나는 두 사람이 절반씩 나눠 받는다.
두 학자의 연구는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충격'에서 출발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 정부는 불황기엔 금리를 내리고 재정지출을 늘리며, 호황기엔 반대로 움직이는 케인스식 처방으로 경기를 관리했다.
하지만 석유파동이 덮친 1970년대 이 같은 처방만으로는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서구 경제는 장기간 저성장·고실업·고물가에 시달렸다.
199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루커스는 과거 통계에서 뽑아낸 평균적 관계에 기댄 모형으로는 정책을 설계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정책이 바뀌는 순간 사람들의 행동도 함께 바뀌기 때문이다. 이른바 '루커스 비판'이다.
경제학계에 남은 숙제는 개별 가계와 기업의 의사결정에서 출발하면서도, 중앙은행이 실제로 쓸 수 있을 만큼 단순한 모형을 만드는 것이었다.
"소비는 '뉴스'에만 반응한다"…홀이 증명한 '내다보는 가계'
홀 교수는 소비와 고용, 생산성을 두루 연구해 온 거시경제학자다. 2010년 미국경제학회 회장을 지냈고, 미국 경기침체의 시작과 끝을 공식 판정하는 미국경제연구소(NBER) 경기순환판정위원회를 1978년부터 2024년까지 이끌었다.
민간소비는 총수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소비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경기 대응책도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경제학계는 오래전부터 가계가 이번 달 월급이 아니라 평생 벌어들일 소득에 대한 기대에 맞춰 지출한다고 봤다. 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의 '항상소득가설'이다. 문제는 검증이었다. 사람들이 머릿속에 품은 기대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홀 교수는 1978년 발표한 논문에서 이 문제를 거꾸로 풀었다. 가계가 이미 미래에 대해 아는 모든 정보를 반영해 소비하고 있다면, 오늘의 소비 수준 자체가 기대의 요약본이 된다. 소비가 달라지는 건 승진, 실직, 예상치 못한 지출처럼 '새로운 소식'이 생길 때뿐이다.
새 소식은 말 그대로 미리 알 수 없으므로, 소비의 변화 역시 예측할 수 없어야 한다는 게 홀 교수의 논리다. 그는 미국 데이터로 이를 검증해 이론이 대체로 들어맞는다는 결과를 내놨다.
예컨대 내년 연봉 인상이 이미 확정된 직장인이라면, 그 기대는 이미 오늘의 씀씀이에 반영돼 있다. 실제 인상분이 통장에 들어오는 달에 갑자기 소비가 크게 뛰지 않는 이유다.
홀 교수는 1982년 프레데릭 미시킨 컬럼비아대 교수(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이사)와 함께 개별 가계 자료를 분석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약 2000가구의 소득과 식품 소비 자료를 분석한 결과, 소비행태는 약 80%가 평생소득에 대한 기대에 따라 움직이고 나머지 20%가량은 현재 소득에 비례해 움직이는 모형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이 구분은 재정정책에 직접적인 시사점을 준다. 같은 일회성 현금 지원이라도 저축 여력이 있는 가계에 가면 상당 부분이 저축으로 이어질 수 있고, 생활비가 빠듯한 가계에 가면 소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각국 재정당국이 쓰는 경제 모형에는 현재 이 같은 가계 구분이 반영돼 있다.
홀 교수의 거시경제학 수업을 들었던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들은 가격과 임금이 수요와 공급에 따라 곧바로 움직이지 않고 경직돼 있다고 본다"며 "경제 안정화 정책, 즉 정부의 역할을 오히려 강조한 케인스 정책의 부활이라는 메시지를 줬다고 봐야 한다"고 평가했다.
지난 5일 서울 시중 대형마트 모습. 2026.10.5 © 뉴스1 김명섭 기자
"물가는 기대가 만든다"…우드퍼드가 설계한 중앙은행 모형
우드퍼드 교수는 시카고대를 졸업하고 예일대 로스쿨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가계의 소비 결정에 가격을 즉각 조정하지 못하는 기업, 그리고 기준금리를 정하는 중앙은행의 행동을 결합했다. 1990년대 줄리오 로템버그와의 공동 연구를 거쳐 2003년 저서 '금리와 물가'에서 집대성한 '뉴케인지언 모형'이다.
모형은 가계와 기업, 중앙은행이 서로 맞물려 움직이는 구조다. 가계는 앞으로 벌어들일 소득과 실질금리를 따져 소비를 정한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경기 중립 수준보다 낮추면 저축의 매력이 떨어지고, 가계는 미래 소비를 앞당긴다.
기업은 한 번 가격을 정하면 몇 달씩 바꾸기 어렵다. 그래서 앞으로의 비용과 경쟁사 가격을 미리 예상해 현재의 가격을 매긴다. 물가가 '기대'에 좌우되는 셈이다. 기업들이 중앙은행의 물가목표 달성을 믿으면 오늘의 물가도 그만큼 덜 오른다.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가 물가를 잡는 무기가 되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물가 상승에 대응해 명목금리를 물가 상승폭보다 더 크게 올리는 방식으로 실질금리를 높일 수 있다. 가계와 기업은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금리를 실제로 움직이기 전부터 기대가 먼저 반응한다.
모형은 공급 충격에 대한 처방도 바꿨다.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경제의 생산능력 자체가 줄어들면, 실제 생산이 줄더라도 경기가 과열된 상태일 수 있다. 이때는 생산 감소만을 보고 경기를 부양하기보다 물가 상승과 경기 위축의 정도를 함께 고려해 금리정책을 결정해야 한다는 시사점을 준다.
사람들이 미래를 내다본다면, 중앙은행이 앞으로의 금리에 대해 하는 '말'도 오늘의 경제를 움직일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리를 더 내릴 수 없게 된 주요국 중앙은행이 꺼내 든 '포워드 가이던스'가 이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드퍼드 교수는 2003년 군나르 에거트슨과 함께 쓴 논문에서 금리가 '0'에 가까워 더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중앙은행이 앞으로 저금리를 충분히 오래 유지하겠다고 신뢰할 만하게 약속하면 경기 위축을 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 연준은 2011년 8월 "적어도 2013년 중반까지" 초저금리를 유지하겠다고 밝혔고, 기준금리를 건드리지 않고도 시장금리를 끌어내렸다.
한국은행도 2022년 10월부터 금융통화위원들의 '향후 3개월 내 조건부 기준금리 전망'을 제시해 왔다. 올해 2월에는 전망 기간을 6개월로 확대하고 금통위원들의 기준금리 전망을 점도표로 공개하는 방식으로 개편했다. 한은은 기존 제도 도입 이후 통화정책방향 발표 당일 시장금리 변동성이 줄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우드퍼드 교수는 정부지출의 경기부양 효과 역시 중앙은행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분석했다. 정부가 돈을 풀 때 금리가 함께 오르면 민간 소비와 투자가 위축돼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정을 얼마나 쓰느냐만큼 통화정책과 어떻게 보조를 맞추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컬럼비아대 박사과정 시절 우드퍼드 교수의 수업을 듣고 조교로 일했던 김형석 카이스트(KAIST) 경영대 교수는 "지금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정확히 우드퍼드 교수가 세운 틀 안에서 운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수상은 과거의 기여에 대한 평가이면서, 지정학적 위기처럼 기존 이론에 녹아 있지 않은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연구를 촉구하는 메시지로 보는 게 맞다"고 덧붙였다.
min785@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