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화(Annuity): "죽을 때까지 월급이 나온다면: 톤틴의 유혹"

경제

이데일리,

2026년 October 13일, PM 04:13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매달 꼬박꼬박, 죽는 날까지 월급처럼 들어오는 돈이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놓일까요? 앞 장에서 본 장수 리스크를 생각하면, 평생소득은 가장 자연스러운 해법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품을 실제로 권하면 열에 아홉은 손사래를 칩니다. “종신연금(보험)요? 가입 안 합니다. 내가 일찍 죽으면 원금도 못 찾고 보험사만 좋은 일 시키는 거잖아요.”

퇴직연금 상담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듣는 거절의 이유입니다. 많은 분들이 종신연금을 ‘투자 상품’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내가 낸 돈보다 더 많이 받아야 이득”이라고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빨리 죽으면 손해”라는 억울함이 앞서 가입을 주저하게 됩니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프랑코 모딜리아니가 던진 질문은 유명합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오래 살 위험을 피하기 위해 종신연금을 원할 것 같은데, 왜 실제 사람들은 연금화를 꺼릴까. 이것이 이른바 ‘연금화의 수수께끼(Annuity Puzzle,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장수 위험을 피하려 종신연금을 찾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입을 주저하는 경제학적 기현상)’입니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우리는 17세기 유럽의 낯설고도 강렬한 실험으로 가봐야 합니다.

[본 이미지는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
[본 이미지는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
17세기, 죽음을 담보로 한 내기 — ‘톤틴 연금’

1653년, 이탈리아의 은행가 로렌조 톤티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에게 기막힌 아이디어를 제안합니다. 전쟁 자금이 부족했던 왕실을 위한 자금 조달책이었습니다. “폐하, 시민들에게 돈을 걷으십시오. 그리고 그 돈을 모아 매년 이자를 주겠다고 하십시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가입자가 죽으면, 그 사람에게 주던 이자는 국고로 회수하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다른 가입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톤틴(Tontine) 연금’의 시초입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100명이 가입했다가 1년 뒤 10명이 죽으면, 죽은 10명의 몫을 살아남은 90명이 나눠 갖습니다. 시간이 흘러 생존자가 줄어들수록, 살아남은 자가 받는 돈은 커집니다. 이 구조는 훗날 투기성과 도덕적 불편함, 남용 가능성 때문에 쇠퇴하고 규제의 대상이 되었지만, 중요한 원리 하나를 남겼습니다. 오래 사는 사람에게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면, 그 위험은 혼자 감당하기보다 집단 안에서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톤틴은 현대 연금과 보험의 핵심 원리인 ‘위험의 공유(Risk Pooling)’와 ‘장수 보너스(Mortality Credit, 먼저 사망한 가입자가 남긴 자산이 살아남은 생존자들에게 나누어지며 생기는 연금 수익률 보태기 효과)’를 직관적으로 보여준 역사적 실험이었습니다.

제도의 본질 — 이것은 ‘투자’가 아니라 ‘보험’이다

우리가 종신연금에 대해 오해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종신연금은 수익률을 따지는 ‘투자’가 아닙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는 ‘보험’입니다. 자동차 보험을 생각해 봅시다. 사고가 안 나서 보험금을 못 받았다고 억울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고가 안 난 것이 다행이고, 보험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비용이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종신연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오래 살 위험’에 대비하는 보험입니다. 일찍 사망해서 원금을 다 못 받는 것은 감정적으로는 억울할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장수 리스크가 발생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예상보다 훨씬 오래 살게 된다면, 그때는 먼저 사망한 사람들이 남겨둔 위험분담의 몫, 즉 장수 보너스 덕분에 내가 굶어 죽지 않게 됩니다. 연금화의 본질은 보험사에게 돈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수명 불확실성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한국의 현실 — 필요한데, 믿고 고르기 어렵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 이론을 적용하기에는 치명적인 걸림돌이 있습니다. “종신소득이 필요한 건 알겠는데, 믿고 고를 만한 선택지가 충분한가”라는 질문입니다. 한국에도 보험사의 연금보험이나 일정 기간 분할수령 상품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퇴직연금 안에서 가입자가 자연스럽게 선택할 수 있고, 물가 상승과 투자 성과를 어느 정도 반영하며, 장수 위험을 나누는 매력적인 평생소득 상품은 아직 빈약합니다. 보험사들은 리스크 관리와 수익성 문제로 적극적인 상품 개발에 조심스럽고, 금리연동형 상품은 물가 상승을 충분히 따라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일부 투자형·종신수령 개념이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 시장의 신뢰와 검증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은퇴자 입장에서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목돈을 쥐고 있자니 오래 살까 봐 불안하고, 연금화하려니 일찍 죽으면 손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상품이 복잡하고, 수수료와 보증 조건을 이해하기 어렵고, 물가 상승을 방어할 수 있는지도 불확실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오해만이 아닙니다. 장수위험을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나누어 주는 시장과 제도의 공급이 충분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2부가 남기는 질문 — 누가 장수위험을 나눠 줄 것인가

여기서 이 책의 질문은 다시 제도로 돌아갑니다. 좋은 상품이 부족하고, 상품이 있어도 이해하기 어렵고, 일찍 죽으면 손해라는 감정이 강하다면, 연금화는 시장에 맡겨둔다고 저절로 확산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장수위험을 나눌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일부는 국민연금과 주택연금처럼 공적·준공적 장치가 맡을 수 있습니다. 일부는 일반 보험사가 제공하는 종신연금보험이 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를 퇴직연금 기금이나 인출 전략이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목돈을 단순히 쪼개 쓰는 것이 아니라, 오래 사는 사람에게 돈이 끊기지 않도록 위험을 나누고 현금흐름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적립금의 얼마를 종신소득으로 바꾸고, 얼마를 투자형 인출계좌로 남기고, 주택연금과 국민연금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는 3부에서 한국형 해법으로 다시 다루겠습니다. 지금 이 장에서 붙잡아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연금화는 보험사 배를 불리는 이상한 상품이 아니라, 오래 사는 위험을 혼자 떠안지 않게 만드는 사회적 기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솔직히 복잡하고 못 믿겠다, 차라리 내가 자유롭게 꺼내 쓰게 해 달라.”라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장은 매력적입니다. 실제로 한 나라는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2015년 영국이 단행한 ‘연금 자유화’ 정책과 그로 인해 벌어진 논쟁을 통해, 상품도 부족하고 규제도 경직된 인출 시장이 자유와 보호 사이에서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연금화(Annu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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