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기금형 모델: "네덜란드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경제

이데일리,

2026년 October 20일, AM 06:15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대출 연장 때문에 은행 지점장님 만나러 갑니다. 간 김에 퇴직연금 얘기도 좀 들어주고 와야죠.”

한국 중소기업 사장님들의 흔한 일상입니다. 앞 장까지 우리는 한 사람의 퇴직연금이 태어나고, 굴러가고, 은퇴 시점에 소득으로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질문의 단위를 바꿔야 합니다. 그 모든 선택과 인출의 뒤에서, 누가 금융기관을 상대하고, 누가 비용을 묻고, 누가 성과를 감시할 것인가.

이론상 퇴직연금 가입자인 기업은 금융기관의 ‘고객’이지만, 현실의 구조 속에서는 자금줄을 쥔 은행의 눈치를 보는 위치에 놓이기 쉽습니다. 그러니 “수수료를 깎아달라”, “수익률 관리를 제대로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 네덜란드에서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대형 자산운용사의 임원이 네덜란드 연금 기금 사무실을 찾아와 말합니다. “저희에게 자금을 맡겨주신다면 수수료를 낮추고, 귀하들이 정한 투자 원칙에 맞춰 운용하겠습니다.” 도대체 네덜란드의 연금은 어떤 힘을 가졌길래 금융기관을 사는 쪽이 아니라 부리는 쪽에 설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은 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피어난 ‘위대한 합의’에 있습니다.

[본 이미지는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
[본 이미지는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
1949년, 폐허 속의 악수 — “뭉쳐야 산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네덜란드는 처참한 폐허 상태였습니다. 나치 독일의 점령과 전쟁으로 산업 기반은 무너졌고 국민들은 가난했습니다. 이때 네덜란드의 노동조합과 사용자 단체는 전쟁 중 비밀리에 결성했던 ‘노동재단’을 통해 결단을 내립니다. “나라를 다시 세우려면 노사가 싸워서는 안 된다. 임금 인상을 자제하고, 그 돈을 모아 미래를 위한 저축을 하자. 단, 개별 기업이 각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 전체가 하나로 뭉쳐서 관리하자.”

이 합의를 바탕으로 1949년, 네덜란드는 산업별 연금기금(BFP, Bedrijfstakpensioenfonds, 1949년 네덜란드 노사 대타협이 만든 거대 기금형 모델)에 대한 의무 가입을 가능하게 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합니다. 한 산업 내의 노사가 연금 기금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그것이 충분히 대표성을 가진다고 인정되면, 그 산업에 속한 기업과 근로자에게 가입을 의무화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이 법 덕분에 네덜란드는 수많은 기업이 뿔뿔이 흩어지는 대신, 공무원·의료·건설 등 거대한 산업별 기금으로 뭉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네덜란드 연금이 세계 최상위권 자산 규모를 갖게 된 역사적 기원입니다.

네덜란드 기금의 힘 1 — 회사 밖의 ‘독립된 실체’

이렇게 탄생한 네덜란드 기금의 핵심은 ‘독립성’입니다. 한국처럼 기업 내부의 인사팀이 관리하거나 금융기관과 개별 계약을 맺는 구조가 아닙니다. 기금은 모기업과 법적으로, 재정적으로 분리된 ‘독립된 실체’로 존재합니다. 이 독립된 기금의 이사회에는 돈을 내는 사용자 측과 돈을 받을 가입자 측이 함께 들어오는 ‘노사 동수 이사회(Equal Board Representation)’ 구조가 구축되었습니다. 현역 근로자뿐만 아니라 은퇴자 대표도 참여해 세대 간 균형을 맞추는 구조도 발전했습니다. 이들은 금융 전문가가 아닐 수 있지만, 대신 전문가를 고용하고, 운용 원칙을 정하고, 외부 운용기관을 감시합니다. 금융기관에게 상품을 사주는 소비자가 아니라, ‘지시’를 내리는 주체가 됩니다. ‘청지기’의 실제 모습입니다.

네덜란드 기금의 힘 2 — ‘규모의 경제’가 만드는 협상력

무엇보다 네덜란드 모델의 가장 큰 무기는 규모입니다. 개별 기업 단위로 쪼개져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자금력이 산업별로 뭉치면서 생겨났습니다. 거대 기금이 입찰을 내면, 전 세계 금융기관들이 조건을 맞추기 위해 경쟁합니다. 이것이 바로 규모의 경제입니다. 덕분에 네덜란드 연금은 낮은 비용으로 전문가를 활용하고, 장기 투자 원칙을 흔들림 없이 밀고 갈 수 있습니다.

한국의 현실 — 흩어진 개인은 약하다

반면 한국은 어떤가요? 우리는 계약형 제도입니다. 기업과 금융기관이 1:1로 계약을 맺습니다. 기금이라는 별도의 독립 실체가 아니라, 여전히 기업 내부의 부서가 제도를 관리하고 금융기관이 상품과 행정을 제공하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소외된 자리에서, 금융기관이 주도권을 쥐는 구조가 형성되기 쉽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구조적 한계는 파편화입니다. 개별 기업, 개별 근로자가 뿔뿔이 흩어져 금융기관을 상대하니 협상력이 없습니다. 도매가 아닌 소매가로 비싼 수수료를 내고, 좋은 상품에는 접근조차 못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는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뭉치지 못한 제도의 한계입니다.

계약을 넘어 ‘기금’으로 뭉쳐라

네덜란드 모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흩어진 개인은 약하지만, 뭉친 기금은 강하다.” 다만 이것이 ‘기금형 도입 자체가 개혁의 목표’라는 뜻은 아닙니다. 기금형은 거버넌스를 세우고, 규모로 협상력을 키우고, 전문가를 고용해 자산배분으로 수익을 내는 하나의 틀입니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이 틀을 활성화하는 것이고, 그것은 개혁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 틀만 만들어놓는다고 저절로 좋은 성과가 나오지는 않으며, 진짜 성과는 그 틀 안에서 거버넌스가 실제로 뿌리내려야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틀을 활성화하는 길이 단일한 것도 아닙니다. ‘푸른씨앗’(공공개방형)처럼 중소기업들이 함께 올라탈 수 있는 기금을 키울 ㅈ수도 있고, 연합형 기금이나 금융기관개방형 기금처럼 서로 다른 주체가 경쟁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계약형 구조 안에서도 일임, 적격 상품 선별, TDF 같은 수단을 통해 기금형만큼 쉽지는 않아도 일부 거버넌스 기능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어느 길을 택하든, 핵심은 같습니다. 흩어진 돈을 그냥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대신 지켜볼 주인과 규칙을 세우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독립된 기금과 노사 동수 이사회를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은 아닙니다. 기금이라는 그릇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의사결정, 관리, 실행, 평가가 어떻게 이어지는가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캐나다의 연금학자 키스 암박츠히어가 던진 질문, “좋은 거버넌스는 성과를 얼마나 바꾸는가”에서 출발해 거버넌스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야 그다음 장에서 다룰 캐나다의 조성과 운용 분리, 그리고 이어질 계약형 거버넌스 논의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강력한 기금형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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